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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19. 2019

이런 기분

누군가의 일터에 따라온 기분

타지에서의 삶. ‘타지’라는 단어를 말할 때 혓바닥이 앞니의 뒷면을 살짝 치고 나가는 그 느낌은 묘하게 신비롭다. 굉장한 뜻은 없다. 타지란 그저 다른 지역, 평소 머물던 곳과는 다른 곳일 뿐이다.


하지만 타지에서 삶을 시작하거나 부여받게 된다면 그것은 매일 낯선 공기와 대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와 남편이 연고도 없고 평소 가본 적도 없던 광명과 파주로 서슴없이 이사를 한 바는 낯섦과의 대적을 기꺼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연고나 지인, 어떤 익숙함이 하나 없는 곳에서 나만의 정보와 기분을 체득하기를 즐긴다. 어느 산책로가 고른 지 구별하고, 집에서 전철역까지 걸음 수를 세어본다. 대략 스무 걸음마다 문을 연 카페들을 하나씩 다니며 에스프레소의 맛을 비교해보고, 이른 아침 분주하게 집을 빠져나가는 직장인들의 뒷모습을 살펴보기도 한다. 그 지역에 친숙해지기 전 아주 짧은 기간 음미할 수 있는 타지의 맛이랄까.

그 맛을 우연한 기회로 다시 보고 있다. 지금은 여행처럼 타지에 와있는데, 그렇다고 여행이라기엔 뭔가 부족하다. 남편의 장기출장지에 내가 며칠 묵기로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한 번씩 출장을 떠난다. 해외든 국내든 가릴 것 없이 종종 간다.


하지만 내가 출장지를 따라가거나 방문한 적은 없었다. 사적인 영역이 남편의 공적인 영역을 건드리게 될까 봐 우려해서였다. 그런 나의 꼬장꼬장함에 남편은 더러 서운해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억지로 나를 끌고 올 요량도 없으니 말이다.


그랬던 내가 이곳에 온 연유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비슷한 감정 때문이다. 이런저런 옛 생각을 하다가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이 자랑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 출장 가는 데 따라가셨다!”

“아빠가 외국에 출장 가는데 우리 가족 다 따라갈 거래.”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를 포함한 주변 아이들은 “우와!” 하고 탄성을 지르며 부러워했다. 오래전에는 부모 중 누군가 출장을 가면(주로 아빠 쪽이었다) 배우자가 따라가거나, 해외나 먼 지역일 경우 자녀까지 데려가는 경우가 흔했다. 출장으로 인해 제공되는 숙소를 이용하며 꿀 같은 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였다.


지금이야 출장에 가족이 따라온다면 유난스러워 보이고, 업무가 목적인 출장에 군더더기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공무원의 출장일 경우엔 크게 문제시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어릴 적 내 부모님은 각자 사업과 자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출장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오후 4시면 본인 공장의 문을 닫고 재깍 들어와 텔레비전을 보는 아빠와 장사하고 해 질 무렵 돌아오는 엄마는 본인들의 일터 외에 출장 따위 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이 아빠의 출장지를 따라가거나, 부모님이 출장지를 다녀오며 사 온 선물을 자랑할 때 내겐 결코 벌어질 수 없는 일이라 동경을 품곤 했다.

남편의 출장지에 한 번도 따라간 적 없고, 하물며 내가 지방에 출장을 가도 업무 외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는 나로서는 남편 출장지에 온 게 상당한 모험이기도 했다. 어쩌다 떠오른 어릴 적 동경을 풀어볼 겸, 출장지에서 평일 내내 심심하다고 아우성치는 남편을 위로할 겸 주말을 껴서 잠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평일을 내리 함께 있기엔 내 일정도 빠듯해서 평일 이틀과 주말 이틀을 남편의 출장지에서 보내기로 했다. 주말에는 그 지역의 명소와 유명한 카페 몇 군데에 들르자며 간소한 여행도 계획했다.


남편에게 가기로 한 날 오후에는 점심을 간단히 챙겨 먹고 소형 캐리어를 꺼내 짐을 꾸렸다. 왠지 그의 출장지에 껴 들어가는 입장이니 나름의 내조를 해야 할 것 같아서 그가 좋아하는 밑반찬과 과일을 꼼꼼히 포장해 캐리어 가장 밑에 넣었다. 아이스팩 대신 군고구마 얼려놓은 것들을 지퍼백에 넣어 곁에 끼웠더니 반찬과 과일 운반이 한결 든든해졌다. 남편의 내의와 트레이닝복 몇 벌, 내가 입을 옷가지와 카메라, 책과 화장품 등을 챙겨 넣고 기차를 타러 갔다.


기차를 오래 타진 않았다. 역에서는 택시를 타고 남편의 숙소로 이동했다. 남편의 숙소는 고층의 오피스텔 건물이 밀집된 말끔한 동네였다.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반찬이 새지 않았는지부터 점검하고, 냉장고를 열어 내부를 정리했다.

그리고 방에 들어섰다. 내가 오기 전 방을 정리한다고는 했지만, 남편의 숙소는 내 눈에 정리할 것 투성이었다. 규칙 없이 모아둔 물건들을 종류별로 구분해 놓고, 미처 씻지 않은 가습기 내부를 닦았다. 구석에 박아둔 과자를 꺼내 주방에 정리했다. 모아둔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 널고, 기준 없이 옷가지를 몰아넣은 옷장을 정리했다. 한참 남편의 숙소를 치우고 있는데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어릴 적 동경하던 출장 따라가기가 이런 거였단 말이지. 집에서 하던 살림 여기 갖고 와서 하는 거랑 똑같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남편의 출장지로 끌고 와 벌이고 있는 내 모습이 가차 없이 웃겼다. 여행처럼 오고 싶었는데 여기까지 와서 집안일을 하고 있으려니, 이곳에 오기 위해 오전에 분주하게 일 처리를 한 내 모습이 아련해졌다.


저녁에는 내가 기다릴까 봐 일찍 퇴근한 남편과 숙소 근처를  돌며 먹고 싶은 메뉴를 골라 식사를 했다. 식사 후에는 산책 겸 동네를 크게 한 바퀴 걸어봤고, 인근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사서 돌아왔다. 그제야 타지의 맛을 조금 봤다.


차를 그리 좋아하는 남편인데 내가 없으니 차 한 잔 안 먹고 지냈단다. 저녁에는 포트에 물을 끓여 좋아하는 녹차를 담아주고, 나는 드립 팩으로 커피를 내려 마셨다.

그리고 오늘 아침, 눈을 떠보니 눈이 나린다. 눈 예보를 들었어도 이렇게 펄펄 내릴 줄은 몰랐건만. 평소 집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편 출근 준비를 지켜보고,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하염없이 창밖을 봤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누군가의 일터에 따라온 기분, 타지에서 눈을 보는 기분이란.’


어릴 적 동경한 출장의 동행과 타지에서의 눈 구경으로 일상을 휘적거리는 이 특별한 기분은 한동안 내 생활에 날숨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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