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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09. 2019

책을 좋아한다는 건

책은 읽을수록 생활을 의미 있게 만든다.

도서관을 좋아하고, 당연히 책도 좋아한다. 엄마 말로는 내가 어릴 때 글을 빨리 익히고 책을 좋아해서 신동인줄 알았다고 한다. 사실 심심해서 읽었다. 어쩌다 보니 네 살에 한 글을 깨우쳤는데, 언니들이 잘 놀아주지 않고, 엄마도 나를 심심하게 대해서인지 집에 쌓여있는 책을 읽었을 뿐이다.


당시 웬만한 집들은 ‘교육용’이라는 목적으로 전집을 으리으리하게 구비했는데, 우리 집도 빠지지 않았다. 위인전집, 세계명작 전집, 한국의 역사 전집이 각각 20권 세트로 있었다. 그러니 전집으로 있는 책이 총 60권. 심심한 아이는 이것만 읽어도 하루가 훌갔다.


엄마도 심심해서 글을 가르쳐 봤는데 내가 금방 배워버리니 신기했단다. 다른 집 엄마들이었으면 아이가 글을 빨리 익혔으니 새로운 책을 사주거나 학원을 보내 다른 과목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엄마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못 미쳤는지 그저 신기하다며, 아이가 신동이구나 하고 생각한 것으로 끝이었다. 다른 가르침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도 자랑을 하고 싶었는지 봄, 여름이면 자꾸 마당에 나와 책을 읽어보라고 하셨다. 마당에는 통나무로 짜서 만든 넓은 평상이 있어 동네 아줌마들이 자주 놀러 오곤 했다. 그 어색한 자리에 굳이 나를 불러 앉히고 소리를 내 책을 읽으라고 시켰다.


내가 책을 읽으면 아줌마들이 어린아이가 또박또박 글을 읽는 게 기특했는지 “어머, 어머”를 연발했다. 사실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소리 내서 읽는 책 보다 속으로 읽으며 상상하는 책이 더 재미있었다. 자꾸 소리 내서 읽으라고 시키니 굉장히 귀찮았다. 그런데 소리 내서 책을 읽다가 엄마를 보면, 눈을 내리깐 엄마 얼굴이 자꾸 웃음을 참는 것 같았다. 왜 그랬는지 이제 알 것 같다. 어쨌거나 그때는 억지로 책을 읽으며 세상의 마당, 세상의 평상이 사라졌으면 하고 바랐다.


어릴 적 책을 읽는 습관은 몸에 자연스럽게 남아 어른이 되고도 책을 자주 읽었다. 대학교 시절 하루에 몇 시간 못 자고 바쁜 와중에도 읽고 싶은 책은 꼭 구입해서 조금씩이라도 나눠가며 읽었다. 사회에 나와서는 출퇴근 시간에 전철 사이에 낀 채로 앞사람의 등을 책 받침대 삼아 독서를 즐겼다.  


본격적으로 독서가 늘어난 건 결혼 이후였다. 결혼 전에는 일주일에 한 권 정도, 혹은 2주에 한 권 읽었다. 독서 속도가 빠르지 않았고, 취미나 여가생활로 하는 활동이 한 둘이 아니었다. 평일에 3번씩 에어로빅이나 요가를 다니고, 저녁이면 친구들과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며 술을 마셔댔다. 주말에는 영화나 전시회를 보고 또 술을 마셨다. 공예를 좋아하니 퀼트를 하고 인형도 만들고, 창작하는 시간이 꽤 들었다. 틈틈이 여행도 다니고, 어찌 그리도 가만있지 못했는지.

결혼을 하고 나니 남편을 자주 살펴보게 됐다. 남편은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었다. 독서 속도가 빠르지만, 놓치는 내용이 없었다. 책을 읽고 나면 빠짐없이 서평을 썼고, 책에서 얻은 정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가공하거나 일상생활에 사용하곤 했다. 나와 달리 취미는 오로지 검도와 독서, 딱 두 가지였고 여기에 몰입하다 보니 독서 속도가 자연스럽게 빨라진 것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결혼 전 남편이 자신의 방을 사진 찍어 보내준 날이었다. 마치 책을 좋아하는 재소자의 방 같았다. 방이 작은 편은 아니었는데, 삼면이 천장까지 꽉 채워진 책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거기에는 빈틈없이 책으로 꽉 차 있었고, 그나마도 자리가 없어서 바닥에 쌓인 책도 있었다. 인테리어를 위한 부분은 조금도 없었다. 여기에 삭막한 침대 하나와 책상이 있었다. 진짜 재소자 거나, 형벌을 받는 사람에게 알맞은 방이었다.


책상 위에도 당연히 책이 있었다. 구석에 행거로 보이는 곳에 몇 벌 되지 않는 옷이 걸려 있었다. 이렇게 사욕 없이 책으로만 이루어진 방은 처음 봤다. 혹시 이 남자 몸에 사리가 있거나, 나와는 다른 체계의 덕을 쌓고 있는 건 아닐까. 신선으로 변신하려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억지로 공부시키느라 부모님이 그 방에 가둔 게 아닌 이상, 이 사람은 책과 한 몸을 이루려는 게 분명했다. 신혼집으로 들어가기 전 나는 먼저 제의를 했다.


“자기, 책 좋아하는 거 내가 다 알아.”

“응, 그런데 왜?”

“하지만 우리의 집은 크기가 정해져 있지.”

“응, 그게 왜?”

“설마 자기 방의 그 책들 다 가져오려는 거 아니지?”

“응? 가져오려고 했는데, 왜?”

“그걸 어디에 두려고?”

“아, 그걸 생각 못 했네?”

이런 해맑은 남자 같으니.


“나도 책이 많고, 자기는 나의 몇 배로 많지. 하지만 우리 삶에 책이 전부가 아니고 공간은 한정돼 있다는 것 알잖아. 우리 각자 존경하는 작가의 책만 추려서 가져오는 게 어때?”

“음, 다 존경하는데?”

“아, 그러니까 진짜 진짜 진짜 존경하는 작가 책만 가져오라고!”

내 존경콜렉션 중 하루키 코너.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존경 컬렉션’을 만들어 신혼집에 들였다. 나는 사랑해 마지않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님의 책, 법정스님과 조세희 작가의 책을 가져왔다. 남편은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사회과학서적들을 가져왔다. 언젠가 내가 한 번 읽어보고 싶었지만 육중한 두께에 왠지 대하기 어려워 읽지 못하고, 숙제처럼 여겨왔던 책들도 있었다.

남편의 존경콜렉션. 나는 이중 3권만 완독했다. 나머지는 여전히 손대기 두려운 숙제형 책들.


이런 ‘독서형’ 남편과 살다 보니 나는 자연스레 독서량이 늘었다. 우리의 여가는 함께 차를 마시며 책 읽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여행지를 가면 그곳에 어울리는 책을 각자 하나씩 골라 떠나는 재미가 생겼다.


2주간 한 권을 겨우 읽던 나는 이제 일주일에 두 권 정도의 책을 읽는다. 책을 읽으며 감탄하고, 한 숨 쉬어가는 시간이 늘었고 그만큼 생활에 감상이 늘었다. 책은 읽을수록 의미가 늘어난다. 밥 한 숟갈에 감상이 깃들고, 냉수 한 잔에 사연 있는 물방울이 모여든다. 손님을 초대해 차리는 음식에 이야깃거리를 함께 담아내고, 아침에 커튼을 걷으며 역사를 생각한다.


책이라는 게 이토록 좋은 것을, 엄마가 가르친 글과 전집 읽기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가르친 글과 전집 읽기가 도움이 된 건 분명하다. 어쩌다 배운 한글과 심심할 때마다 읽은 전집이 내게 독서의 즐거움을 소개해 줬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육중한 ‘숙제형’ 책들은 아직 손을 대지 못 했다. 오늘은 숙제형 책들을 한 번 쓰다듬어 봤는데 팔딱이는 횟감 같았다. 다시 나를 겁먹게 하다니. 그래도 올해 안에는 이 육중한 책들과 한 판 씨름을 붙어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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