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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30. 2019

스토너, 존 윌리엄스

흔하디 흔한 사람으로서의 스토너. 그 생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책이 쌓여 얼굴의 윤곽을 그리고 있는 표지를 보며 상상했던 스토너의 삶. 초반의 청소년기까지를 비교적 짧게 소개한 부분을 읽으며 나는 내내 답답했다. 너무나 묵직한 부모의 태도, 아버지의 손에서 빠지지 않는 흙물까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답답했던 그의 삶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 건 대학에서 문학을 선택한 순간이었다. 몹시 자연스럽게 이끌리듯 선택한 문학과 교육자의 진로. 이 무렵은 전쟁으로 젊은이들의 삶을 흔들어놓을 때였는데 그는 그 분위기에 휩쓸리는 대신 비난받을 수도 있는 학업의 길을 택한다. 그리고 섣부른 결혼이 이어진다. 결혼식을 올린 첫날부터 실패가 시작된 생활, 어처구니없는 방식을 통한 아내의 임신. 그 과정을 밟는 동안 스토너가  영혼을 반짝인 것은 학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바스락거리는 인동덩굴의 섬세한 이파리들에 섞여 따스한 공기 속에서 흔들리는 층층나무의 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짙게 깔려 있었다. 흐릿한 글자들을 집중해서 읽느라 눈이 따가웠고, 머릿속에는 방금 읽은 내용이 묵직하게 들어 있었다. 손가락은 낡은 가죽 표지와 양장본과 종이의 느낌을 여전히 간직한 채 얼얼하게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주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고 그 안에서 기쁨을 찾아냈다. 116p.     


결혼생활은 확실하게 실패했고, 행복을 맛보게 해 준 육아도 다시 한번 어처구니없는 방식으로 박탈당한다. 그럼에도 아내에게 자신의 의견을 타진하지 못하는 스토너가 답답했다. 그리고 새로운 사랑을 만나지만 이미 중년의 교수인 그에게 새 사랑의 결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가 일하는 대학에서는 의견 충돌, 편견과 의견을 혼동하는 그의 상사 때문에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252p.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274p.     

그리고 다시금 찾아온 전쟁은 갑자기 찾아온 병마와 시기를 함께 한 게 아닌가 싶다. 전쟁이 시작되자 급속도로 늙어버린 그의 스승처럼, 두 번째 전쟁시기에 그는 한없이 늙어버렸고 사위는 전사했다. 온몸에 암이 퍼져 손 쓸 수 없는 상태가 됐을 때 마지막에 그는 병상에 누워 ‘넌 무엇을 기대했나?’라며 스스로에게 자문하다 생을 끝낸다.      


스토너라는 이름을 걸고 나온 이 책은 누군가의 성공담, 멋지고 환상적인 순간을 보여주진 않는다. 그래서 흔하디 흔한 사람으로서의 스토너, 너무나 평범해서 진실되게 보이는 그의 생에서 나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일생을 쓸쓸하고 투박하게 살면서도 자신이 속한 문학의 세계를 철저하게 걸어 나간다. 그의 생을 도무지 편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상사와 못된 아내, 숨 막히는 현실과 괴롭힘을 순연하게 받아들이며 쉬지 않고 걸어 나간다. 평생 구부정하고 마르게 살았던 스토너가 현실적이라서 미화한 부분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가 몹시도 아름다웠다.      


누군가는 이 책을 한 남자의 실패담으로 읽을지도 모르겠다. 한 번쯤 반전을 이루고 그윽한 성공을 보여줘도 될 법한 스토너의 삶이 읽는 내내 지루하지 않았던 이유는 억지로 타협하고 자신을 쥐어짜내 무언가를 이뤄내려 하지 않는 그 자연스러움 때문이었다. 다만 그는 주어진 모든 길에 열정을 주고 그로 인해 돌아온 어떤 결과는 받아들이며 삶을 관조했다. 그런 스토너에게 나는 깊은 연민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게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 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3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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