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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31. 2019

헝거, 록산 게이

몸무게가 행복의 주체는 아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뚱뚱한 사람이 싫었다. 둔하고 게을러 보이고, 청결해 보이지 않았다. 사실 뚱뚱한 사람이 둔하거나 청결하지 않다는 건 편견이다. 나는 뚱뚱한 사람에 대한 편견을 학습받은 사람 중 하나였다.   

   

소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배운다. 날씬하고 아담해야 한다고. 자리를 많이 차지해선 안 된다고. 남자들 눈에 보기 좋아야 한다고. 사회에서 받아들일 만해져야 한다고. 대부분의 여자들은 알고 있다. 우리는 점차 작아지고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더 크게 반복적으로 해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이 사회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기준에 힘없이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다.      


어릴 적부터 나는 몹시 말랐다. 빼빼 마른 몸이었고 편식이 심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조금씩 살이 올랐는데, 대학 졸업 전에는 외모에 자신감이 바닥인 데다 취업도 신경 쓰여 독하게 살을 뺐다. 


그 결과 3개월 만에 11킬로그램을 빼고 저체중이 됐다. 옷 사이즈가 확연히 줄었고, 다이어트 효과로 짝사랑 역사도 막을 내리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다이어트 비법을 물어봤고, 겉으로 태연한 척했지만 나 스스로 바짝 말라 웬만한 옷이 헐렁해진 순간을 즐겼다.      


하지만 다이어트에는 단점도 있었다. 요요를 막기 위해 살을 뺀 뒤에도 식이조절과 운동을 계속했고, 건강이 확실히 무너졌다. 몸무게가 줄어든 만큼 면역력이 떨어진 건지 툭하면 몸 여기저기에 염증이 생겨 병원에 다녔다. 늘 예민했고, 친구들과 맛있게 저녁을 먹고 난 다음 날 두 끼 정도는 굶어야 했다. 누가 지나가는 말로 “너 다시 찐 거 같다.”라고 하면 며칠씩 하루 세끼 삶은 양배추만 먹었다. 이런 날은 잔뜩 예민해져서 주변에 짜증이 폭발했다.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다이어트 전의 나는 결코 뚱뚱하지 않았다. 분명 정상체중이었다. 20대의 젊은 여자가 예뻐 보이는 옷을 입기 위해, 화려함을 최대치로 발산하기 위해 필요한 몸무게에서 조금 많았을 뿐, 나는 분명 정상체중이었다. 살을 빼고도 나는 망할 55 사이즈의 지옥에 살았다. 55가 아닌 66을 입는다고 세상 무너질 것도 아닌데 몸무게가 조금만 늘어도 난리를 치고, 미친 듯이 운동을 했다.      


그렇게 지금까지 살아왔다. 나는 아직도 다이어트를 멈추지 않는다. 다이어트 직후의 무게에 비하면 한없이 늘어버린 무게지만 여전히 나는 정상체중이다. 그럼에도 나는 체중계 위에서 놀라고, 놀란 날이면 두부 한 모로 식사하거나 땀에 푹 절도록 운동을 한다. 내 머릿속에 꽉 박힌 몸에 대한 편견, 비만에 대한 공포가 얼마쯤 비틀렸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마음에 안정을 찾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 걸까?     


나는 내 몸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을 싫어한다. 내 몸으로 인해 느끼게 되는 감정을 싫어한다. 사람들이 내 몸을 보는 방식이 싫다. 사람들이 내 몸을 훑어보고 내 몸을 대하고 내 몸에 말을 보태는 방식이 싫다. 내 자아의 가치를 내 몸의 상태와 동일시하는 것도 싫고 이 동일시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서 싫다. 나의 인간적인 취약점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어려워서 싫다. 내 몸을 사이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 수많은 여성을 실망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싫다.
하지만 나는 나를 좋아하기도 한다. 나의 인격, 나의 특이함, 나의 유머 감각, 거칠면서도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내가 좋다. 내가 사랑하는 방식과 내가 글 쓰는 방식이 좋고 친절함과 까칠함이 공존하는 내 성격과 말투가 좋다. 이제 40대가 되어서야 나는 나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심이 날 괴롭히기도 한다.     


록산 게이는 어린 시절 충격적인 일을 겪은 뒤 자신의 몸이 망가졌다고 느꼈고 음식에 집착했다. 누구의 눈에 띄지 않는 여성으로, 혹은 여성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의 인간이 되기 위해 몸을 불리고 신경질적으로 탐식했다. 기하급수적으로 체중이 늘어난 이후에는 다시금 커져 버린 몸을 미워한다. 


보기 좋게 살지 못해 차별받는다고 느끼는 록산 게이는 어려서부터 나이가 든 지금까지 내내 몸에 대한 허기에 굶주려있다. 이는 록산 게이가 생각하기에, 또 내가 공감하기에 우리가 ‘날씬한 몸=정상’이라는 프레임에 메여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집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서 있게 되고 어떻게 보이게 될지 질문해봐야 한다.      


내 인생에 관한 이야기는 모조리 내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강렬한 원함, 끝없는 허기에 관한 이야기이고 어쩌면 내가 감히 나에게 허락하지 않은 것들을 갈망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늘었을 때의 록산 게이의 몸무게는 261킬로그램이었다.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으면 눈치가 보여 식사를 즐기지 못한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않는 팔걸이의자나 1인용 의자에 앉으면 그녀의 몸에는 항상 멍이 든다. 친구들이 함께 오르막을 걸으면 혼자 죽도록 숨이 찬다. 대학교에서 흔히 사용하는 책상과 의자가 붙은 작은 의자에 그녀는 도무지 앉을 수 없다.      


우리가 ‘표준’이라 생각하는 1인용에 타인의 몸을 향한 배려, 차별의 인지는 없었다.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뚱뚱한 사람을 보면 당연히 치료를 받거나 개선이 필요한 존재로 판단하던 우리 속 꽉 박힌 편견을 록산 게이는 차근차근 짚어낸다.      


정상체중이 분명하면서 자신을 학대하듯 다이어트를 하고, 지금도 살이 찔까 봐 라떼 한 잔 먹는 데 벌벌 떠는 나 역시 몸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하긴 마찬가지다. 내 삶의 역사를 쌓는 데 20대 몸이 장애물이 아니었음에도 그토록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작은 사이즈에 욱여넣던 나는 필시 마음속 허기와 편견을 똑바로 마주했어야 했다.      

나는 우리의 슬픈 이야기들에 진력이 났다. 슬픈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이런 이야기들을 갖고 있다는 것과 그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 나를 지치게 만든다.      


지금은 다른 사람들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덜 신경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내 행복의 기준은 내 몸무게가 아니라 내 몸에 더 편안해하는 감정임을 배우는 중이다. 여성이 삶을 사는 방식과 몸을 다루는 방식을 너무나 독단적으로 규정하려는 이 악독한 문화적 관습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더욱 알려져야 할 사람들의 삶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내가 감히 가능하리라 생각지도 못한 직업적 성공을 누리고 있다.
적어도 나의 일부는 나의 최악의 날들을 지나왔다는 것을 알고 나 자체를 바꾸고 싶지 않다.      


몸이 매기는 숫자와 다이어트의 고통으로 얼룩진 시절은 어찌 됐든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여전히 내 몸무게가 마음에 들지 않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체형이 변하고 있다. 불만투성이 몸을 가진 나는 헝거를 읽으며 다른 이유를 떠나서 최소한 몸무게 따위로 자신을 미워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물론 살이 찐다고 유쾌하진 않다. 다만 이 몸을 미워하지 말자고, 원망하지 않고, 현실적이지 않은 타인의 몸에 주눅 들지 말자는 다짐으로 나를 지켜가고 싶다.      


책에서 만난 좋은 문구를 메모하려고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더니 다이어트 프로그램 광고가 뜨고, “우리 친해져요~”처럼 영혼 없는 댓글 작성자를 눌러보면 어김없이 디톡스나 다이어트 식품 판매자다. 내가 핸드폰으로 칼로리를 검색하거나, 즐겨 구독하는 운동 페이지 때문일 것이다. 

이런 게 록산 게이가 말하는 악독한 문화적 관습일까? 차마 도전장까지는 못 내밀어도 그들의 전시적 성공담에 예민해지지 않기로 한다. 모두가 똑같은 몸매와 체질량지수를 가져야만 ‘정상’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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