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처 돌보며 살기에 참 빠듯한 인생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곤 한다. 지독한 이기심에 스스로 무기가 돼버릴 때도 있다. 남아라면 욕 한 사발에 침이나 퉤 뱉고 돌아설 일에도 가족이라서 가슴에 가시를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눈물에 발이 부르터도 그 눈물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노릇이 허다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내 살과 뼈가 엄마의 것이라서. 혹시 하필이면 내가 엄마를 가장 아프게 한 상처라서 엄마가 평생 그 흉터를 확인하며 살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나는 안다. 나라는 사람이 힘내자는 구호를 외쳐가며 섣부른 용기로 자신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임을. 억지로 웃어가며 괜찮은 척해도 내가 무너지는 원인을 제거할 수 없음을. 다시 서는 힘도 이유도 결국 나의 내면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꽃송이 하나가 열매의 모든 운명을 쥐고 있다는 건 놀랍고도 잔인한 노릇이다. 복숭아를 키우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꽃이 열매가 될 수 없다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잎보다 꽃망울이 먼저 돋는 복숭아는 봉우리 때 운명이 정해진다. 하늘을 향해 맺힌 꽃망울은 피기도 전에 제거된다. 열매가 맺혀봐야 자라는 동안 모양이 뭉툭해지니 상품이 못 되는 까닭이다. 너무 촘촘히 맺힌 꽃망울도 간격을 두어야 하니 미안하지만 어떤 것을 살고 어떤 것을 떨어져야 한다. 열매로 이어지는 비바람의 과정보다도 먼저 이런 절체 정명의 순간을 겪으니 살아남을 꽃이 찬란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