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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10. 2019

익숙한 길의 왼쪽, 황선미

내 상처 돌보며 살기에 참 빠듯한 인생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를 몹시 좋아한 나머지 최고 애정 작가 목록에 꼬박꼬박 넣는 황선미 작가의 올해 나온 산문집이다. 허리를 부여잡은 중년 여인의 뒷모습이 표지에 실려 있다.

‘아, 예쁘다. 그런데 그림이니 예쁜 거겠지.’


사람의 뒷모습이 꾸밈없이 예쁘긴 어려우니까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책을 열어 작가의 말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어딘가 아프고 약점일 수 있는 내면의 응어리를 들여다본단다. 익숙한 안정감을 깨고 불편하더라도 말이다.

아, 큰일 났네. 이 책을 읽다가 나는 엄청 아플지도 모르겠구나.      


살다 보면 때때로 우리는 지옥을 경험하곤 한다. 지독한 이기심에 스스로 무기가 돼버릴 때도 있다. 남아라면 욕 한 사발에 침이나 퉤 뱉고 돌아설 일에도 가족이라서 가슴에 가시를 끌어안고 버텨야 하는, 눈물에 발이 부르터도 그 눈물에서 발을 빼지 못하는 노릇이 허다하다.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관계는 잘못 꿰어진 단추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내가 엄마의 새끼였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의 나이가 되어갈수록 이토록 가슴이 저미는 모양이다. 내 살과 뼈가 엄마의 것이라서. 혹시 하필이면 내가 엄마를 가장 아프게 한 상처라서 엄마가 평생 그 흉터를 확인하며 살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나와 닮은 감정을 만나면 신기하고 슬프다. 세상에, 엄마가 날 사랑했다 생각지 않는다니. 설마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차마 누구에게 그걸 말할 수 있을까?      


작가가 쓴 바에 나는 공감했다. 나 역시 그러하다 느껴왔으니까. 나의 엄마는 평소 냉담하고 자식에게 무관심하다. 살면서 엄마에게 가장 많이 받은 게 ‘방치’다. 그 와중에 나는 무관심과 방치를 벗어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며 늘 앙알거리는 덜 자란 아이였다. 내 존재가 뭘 그리 잘못해서, 나름 막내딸인데, 좀 예뻐해 달라고. 어떤 수신호를 보내도 닿지 않는 우주가 엄마였다.      


반대로 나의 시어머니는 종종 말실수를 하셔서 내 속을 시커멓게 태우긴 해도 사과할 줄도 알고 자식에게 관심만큼은 넉넉하시다. 오히려 남편이 그 관심을 버거워했다. 오매불망 아들 생각, 아들 걱정하는 본인의 엄마가 버거워 스무 살에 세뱃돈을 모아 집에서 멀지도 않은 대학교 앞에 방을 얻어 나온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내가 부모로 대하는 두 명의 엄마만 봐도 이렇게 다르다. 한쪽은 너무 차고 한쪽은 너무 뜨거워 그 온도차에서 나는 몹시 앓는다.      


며칠 전 엄마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전화한 딸 목소리가 들려도 만사 귀찮다는 대응에 나는 전화를 끊으면서 후회했다. 괜히 했다, 괜히 걸었어. 이런 응대와 감정이 처음도 아닌 것을.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모녀지간이란 으레 따뜻하고 다정한 줄로만 안다. 나는 엄마랑 딸 사이가 공장서 찍어내듯 모두 좋고 예쁘지 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왜 그리 생각하냐고 되묻는다면 구구절절 말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애초에 사람들의 착각에 토를 달지 않을 뿐이다.      


이런 나와 닮은 감정의 글을 읽으며 작가가 “나는 엄마가 나를 사랑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쓸 때 얼마나 용기가 필요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예쁜 모녀처럼 다정한 엄마가 내겐 없어요, 이걸 시인하고 인정하는 게 얼마나 두려운지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나는 안다. 나라는 사람이 힘내자는 구호를 외쳐가며 섣부른 용기로 자신을 일으킬 수 없는 사람임을. 억지로 웃어가며 괜찮은 척해도 내가 무너지는 원인을 제거할 수 없음을. 다시 서는 힘도 이유도 결국 나의 내면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없는 일로 칠 수도 없는 게 천륜이 아닐까. 천륜이 지독하게 미워서 나는 콤플렉스를 발산시키곤 했다. 여자가 고등학교만 나와 경리나 하고 살면 장땡이라는 엄마는 내가 벌어 다니는 대학도 반대하셨다. 가난하게 살 거라며 엄마가 그토록 비난했던 작가의 길을 나는 기어코 고집했다. 시집갔으면 회사 다니면서 잘난 척하지 말라고, 조신하게 집안에서 살림이라 하라는 엄마의 무심한 말에 끝까지 일해 보이겠다며 이를 박박 갈았다. 돈 씀씀이 헤픈 걸 세상 최고 악질처럼 보는 엄마의 살뜰함이 싫어서 한 번씩 물욕을 부렸다. 살 빼지 말라면 살 뺀다고 굶고, 술 마시지 말라면 굳이 기어나가 술을 퍼마셨다.    

  

콤플렉스를 주체하지 못해 오기로 살던 그 날들이 내겐 다 흉터다. 흉터는 새로 난 살이라 좀 더 단단하고 젊은 살이라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렇게 상처투성이의 내가 홀로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았던 시간에 갇혀있을 때 황선미 작가의 글은 내게 조용히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 좀 봐라, 이 새파란 작가야. 나도 이렇게 상처 받고 힘들었어도 근근이 버티고 사는데, 너도 잘 좀 살아보지 그러니.”     


그러니 이 책을 읽고 어떻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모든 문장들이 내 가슴에 경을 칠 때 미뤄뒀던 눈물이, 쾌활한 척 숨겨뒀던 진짜 속내를 달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말이다. 언젠가 나는 불씨가 꺼진 성냥개비처럼 차분하게 내려놓고 모든 걸 용서하고 싶다. 지금은 활활 타오를 여분이 있다 쳐도, 언젠가 더 탈 게 없을 그런 나이가 된다면 한 번은 시도해보고 싶은 용서가 있다.      


꽃송이 하나가 열매의 모든 운명을 쥐고 있다는 건 놀랍고도 잔인한 노릇이다. 복숭아를 키우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꽃이 열매가 될 수 없다는 사실부터가 그렇다. 잎보다 꽃망울이 먼저 돋는 복숭아는 봉우리 때 운명이 정해진다. 하늘을 향해 맺힌 꽃망울은 피기도 전에 제거된다. 열매가 맺혀봐야 자라는 동안 모양이 뭉툭해지니 상품이 못 되는 까닭이다. 너무 촘촘히 맺힌 꽃망울도 간격을 두어야 하니 미안하지만 어떤 것을 살고 어떤 것을 떨어져야 한다. 열매로 이어지는 비바람의 과정보다도 먼저 이런 절체 정명의 순간을 겪으니 살아남을 꽃이 찬란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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