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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12. 2019

딸에 대하여, 김혜진

딸 가진 죄인에 대하여

고등학교 때, 큰언니가 결혼을 했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큰 형부와 큰언니는 연애를 시작했고, 몇 년간 데이트에 큰 언니가 집에서 심심해하는 막내를 데리고 나가는 통에 나는 큰 형부가 참 익숙했다. 그래서 둘이 결혼한다고 했을 때 놀랐지만 재밌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사위에 대한 엄마의 깍듯함 때문이었다.


엄마는 평소 무뚝뚝하고 사근사근 먼저 말을 건네는 사람이 좀체 되지 못했다. 그날까지 살면서 내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받아온들 잘했다 한 마디 없었고, 칭찬을 갈구하는 수많은 행동에도 언제나 빨리 들어가 자라든가 밥이나 먹으라는 말이 전부였던 엄마가 형부에게는 어찌나 상냥하고 온갖 칭찬을 긁어모으는지. 큰 형부의 첫 생일에는 일가친척을 모두 불러 떠들썩한 잔치까지 벌였고, 잔칫상에 올릴 떡까지 손수 빚으셨다.


도무지 평소답지 않게 형부에게 잘하려 드는 엄마의 야단법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원인을 묻는 내게 엄마는 '딸 가진 죄인'이라는 해명을 한 적 있다.

"내가 딸 가진 죄인이라 그렇지. 내가 잘해야 네 형부가 네 언니한테 잘하지 않겠냐."


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와 내 자매를 낳아 키운 게 왜 엄마를 죄인으로 만드는 걸까? 다행히도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하던 엄마는 이후 둘째 형부와 내 남편까지 사위 세 명을 들이는 동안 죄인의 사근 거림이 다소 줄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얼굴을 비추면 나는 으레 집구석에 있는 바가지처럼 대해도 내 남편에게는 늘 웃는 낯으로 대하셨고, 모든 행동을 칭찬하셨다. 남편이 밥을 빨리 먹으면 잘 먹는다 칭찬, 고기를 많이 먹으면 고기를 잘 먹는다 칭찬,  김치를 먹으면 김치도 잘 먹는다 칭찬, 핸드폰을 보고 있으면 장모집에서 심심해서 어쩌냐고 걱정, 말이 많으면 재밌다고 칭찬, 말이 없으면 차분하다고 칭찬, 남편이 좋아하는 간식까지 하나하나 챙기는 정성까지. 내 생전 못 받아본 칭찬이 모두 남편에게 돌아가는 모습에 학을 떼곤 했다.


세 명의 사위를 들이는 동안 습관처럼 굳어진 엄마의 '딸 가진 죄인' 숙명을 지켜보며 딸 가진 죄인으로서의 엄마 역시 누군가에게 딸이라는 사실이 늘 사무치곤 했다. 평생 '왜'가 지워지지 않았던 엄마의 숙명을 하필 나는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정면으로 마주하고 말았다.

여름밤에는 창 너머로 들이치는 소음 탓에 잠들기가 어렵다. 배달 오토바이의 굉음과 텔레비전 소리, 고함을 내지르며 싸우는 2층 집 부부의 목소리. 나는 텔레비전 불빛에 의지해 무릎에 파스를 붙이고 어깨에 연고를 바른다.


찬바람이 설설 들어오고 위층에서 물이 새지만 고칠 여력도 없는 '나'는 딸애의 엄마다. 요양사로 일하지만, 저임금과 높은 노동강도에 어찌 그 일이 반갑기만 할까. 고된 하루를 마치면 낡은 집에 들어앉아 몸에 파스와 연고를 바르는 힘없는 엄마의 모습이다. 그런 나는 '딸애'에게 딸 가진 죄인이라 소에 있는 말 한마디 호탕하게 못 한다.


딸애는 내 삶 속에서 생겨났다. 내 삶 속에서 태어나서 한동안은 조건 없는 호의와 보살핌 속에서 자라난 존재. 그러나 이제는 나와 아무 상관없다는 듯 굴고 있다. 저 혼자 태어나서 저 스스로 자라고 어른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모든 걸 저 혼자 판단하고 결정하고 언젠가부터 내게는 통보만 한다. 심지어 통보하지 않는 것들도 많다. 딸애가 말하지 않지만 내가 아는 것들. 내가 모른 척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딸애와 나 사이에 고요히, 시퍼렇게 흐르는 것을 난 매일 본다.


갚지도 못할 남의 돈을 함부로 빌려 쓰다니.
딸애의 잘못은 곧 나의 잘못이다, 하는 생각. 서른이 넘은 성인들이니까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한 일이다, 하는 생각. 온갖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생각해보면 산고를 거쳐 자식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부모는 자식의 요구에 수긍한다. 울면 달래고, 배고파하면 뭔가를 먹이고, 씻기고, 불편해하면 편하게 해 주려 안간힘을 쓰며 이미 죄인의 숙명을 시작했으리라. 넉넉지 않은 환경과 홀로 딸을 키우는 상황 속에서의 나는 끝이 없는 노동, 죽음이 아닌 삶을 두려워한다. 자식이 주는 행복은 거래조건이 분명하다. 부모의 노고를 충분히 먹어야 행복이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읽는 내내 글 속에 그려진 현실이 너무 답답했다.


게다가 친딸보다 더 딸처럼 굴고, 어쩌면 마음속으로 바라 왔던 딸애의 모습을 가 진 '그 애' 레인은 딸의 동성 연인이다. 그 애는 '나'의 눈치를 보면서도 당당하고, 제 할 말을 하면서도 어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 애쓴다. '나'의 끼니를 묻고, 약을 사다 주고, '나'가 데려온 젠을 돌보는 데 열성인 사람도 딸애가 아닌 '그 애'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겠지.


방백으로 '나'가 하고 싶은 말이 책의 군데군데 흐른다. 딸의 어려운 현실을 바라보며 혹여나 위태한 자신의 삶이 비치는 바람에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는 방백이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죠. 나중엔 부모님 마음을 헤아리게 될 거예요. 교사로서 학부모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말. 나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순진하고 어리석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아이는 점점 더 엇나가고 멀어질 거라고. 어떻게 해도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 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해 줘야 했을까.


부모만큼 자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내 새끼를 내가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내 속에서 나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처럼 구는 자식을 마주한 부모가 세상의 대부분 아닐까. 자식은 태어나 자라는 내내 부모와 조금씩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차마 하고 싶은 말 한마디 못 하는 이유가 부모의 숙명일 거라 희미하게 짐작해본다. 그 먹먹함에 침잠한다. 나는 책 속의 온도가 도무지 낯설지가 않아서 먹먹했다.

사위에겐 상냥하지만 딸에겐 무뚝뚝한 엄마에게 딱 하나 고마워하는 게 있다. 초등학교 시절, 짝이랑 싸우다가 열 받아서 짝의 보온도시락을 던져버린 적 있었다. 나중에 짝과 화해는 했지만 도시락 값은 물어줘야 마땅했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내가 짝의 도시락을 던져서 부쉈어. 안에 진공유리가 다 부서져서 흔들면 모래 소리가 나. 나 때문에 짝이 찬밥 먹어야 한대. 엄마가 그 도시락 값 좀 물어줘."

그때 엄마는 딱 잘라 거절했다.

"네가 한 짓이잖아. 네가 책임져. 네가 부순 도시락 값을 왜 엄마가 내니?"


나는 그때만큼 '책임'에 대해 크게 깨우친 적이 없었다. 내 행동은 스스로 책임져야 마땅하고, 애초에 책임이 버거운 행동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경각심을 열 살에 진하게 배웠다. 당시에는 엄마가 참 모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때만큼은 엄마가 '딸 가진 죄인'에서 가장 자유로웠던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 잘못을 엄마의 잘못으로 전이시키지 않고 스스로 잘못을 갚아가도록 몰아세웠기에 지금껏 내가 큰 죄를 짓지 않고 멀쩡히 살아왔다고 믿는다.


이 책의 전반은 여러 입장의 딸들에 대해, 가장 중심에는 딸 가진 죄인에 대해 말한다. 딸은 어느 딸의 몸에 서 나왔고, 어느 딸의 엄마가 되고, 또 그 딸이 다시 누군가의 엄마가 되며, 여러 입장의 딸들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중에서도 딸 가진 죄인으로서의 딸, 엄마라는 존재에게 으뜸으로 소중한 것은 자신을 죄인으로 만든 딸이라는 사실을 뼈아프게 적어 내린 이야기였다.


엄마에게 복잡한 심정을 가진 나는 딸 가진 죄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고 또 이해하고 싶지 않다. 다만 언젠가 내게 따끔하게 책임을 가르치던 시절의 엄마가 얼마나 멋있었는지, 그 저녁 서럽게 울던 내가 지금은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 수 있음을 기회가 된다면 상기시켜 드리고 싶을 뿐이다. 죄인으로 살지 않아도 충분한 당신은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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