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철이나 버스에서 비린내가 훅 끼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마다 굳이 의도를 담지 않더라도 비린내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럴 땐 눈이 닿을 만한 곳에 항상 검은 봉지가 있다. 혹은 알록달록한 장바구니나 배낭에서 존재감이 드러나기도 한다. 아마 그 안에는 집까지 거리가 좀 되는 어딘가에서 좋은 값과 품질에 반해 냉큼 사들인 생선이나 어패류가 들어있을 것이다. 건어물의 쪼그라든 비린내와는 조금 다른 그런 냄새.
‘그렇지, 어류가 담겨 있다면 비린내는 자연스러운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시 바라본다. 해수에 살던 생물이 뭍으로 끌려 나와 냄새를 풍기는 것은 흠잡을 데 없이 자연스럽다. 그 생물 입장에서야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살던 곳은 나트륨과 플랑크톤이 풍부하고 건조할 길이 없는 물속이었건만, 강제로 끌려와 재물로 바쳐질 운명이라니. 억울하면 억울할수록 비린내를 풍길 지도 모르겠다. 아우성을 닮은 비린내는 얇은 봉지를 뚫고, 장바구니를 한 번 더 뚫고 주변 사람들의 코를 찌른다.
어쨌든 비린내는 역하다. 그 역한 비린내를 눈으로 찾아내는 건 어류를 들고 대중교통을 탄 누군가를 원망하려는 게 아니라 옅은 습관과 같은 것이다. 물론 비린내를 좋아해서 그런 건 아니다. 비린내는 분명 역하다. 내가 비린내를 느끼는 순간 주위를 둘러보고 그 너머의 누군가를 상상하는 것, 나의 외할머니 덕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할머니가 늘 비린내를 품고 다닌다고 생각했다. 품는 것은 풍기는 것과 천양지차다. 어시장에서 오래 일한 할머니의 그 냄새는 작은 체구에서 나는 살 냄새에 항상 해산물과 부대끼며 살면서 근근이 베여있는 냄새였다. 그래서 푸근하고 달근한 살 냄새에 비릿한 생선 냄새, 하루를 고되게 지내며 번 현금의 꼬릿한 냄새가 한 데 섞인 특유의 체취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그보다 더 멀리 시작하면 엄마가 아기였을 무렵부터 할머니는 연안부두 어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물론 혼자 하신 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함께 장사를 하시긴 했지만 사람 좋고 구경 다니기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보다 가게 일을 도맡아 한 쪽은 할머니였다.
엄마가 기억도 못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는 어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어시장 일은 해가 뜨기 전 시작된다. 샛별이 총총한 시간에 배에서 실려 나온 신선한 해산물을 도매가에 떼다가 할머니에게 배정된 가게로 열심히 끌고 와서 얼음과 물로 가득 채워 장사 준비를 하셨다.
아침에는 주로 식당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식재료를 사러 어시장에 붐볐다. 집에서 싸온 밥과 김치, 함께 장사하는 아주머니들과 해산물을 대강 넣고 끓인 찌개를 나눠 먹으며 점심식사를 마치면 찬거리를 준비하는 주부들이 장을 보러 어시장을 찾았다. 퇴근길 생선이나 살 겸 들르는 근처 회사 여직원들이나 백화점 직원들이 있었고, 저녁 6시 반쯤 가게를 정리하면 할머니는 드디어 본인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할머니는 쉬는 날 없이 하루 14시간쯤은 일한 셈이다. 명절 대목이면 20시간은 일해야 했다. 그 삶이 70 가까운 나이 되도록 지속됐으니 족히 50년 가까이 어시장에서 일하셨다.
싱싱한 어류를 팔아야 하는 입장이고, 반대로 싱싱한 어류를 먹을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함께 장사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게 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외가와 우리 집에서 해물은 마를 새 없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이었다. 그때는 그게 귀한 줄도, 어떤 경로로 우리 집에 오는 줄도 모르고 먹었다.
고기는 없어도 생선은 올라오는 밥상, 게딱지가 버티고 선 간장게장과 빨간 꽃게무침, 청록색 등짝이 퉁퉁하게 살찐 청어와 꽁치, 집의 서쪽 벽면 처마 밑에 말리던 물메기. 나는 그런 게 하도 흔해서 그게 할머니의 품에서 나오는 귀한 거라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조금씩 할머니의 노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였을 것이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일 년에 네댓 번은 엄마를 따라 할머니의 가게에 갔다. 할머니가 딸에게 주고 싶어 뭔가를 잔뜩 사셨는데 짊어지고 갈 자신이 없을 때 한 번씩 부르시는 거였다.
유치원 다닐 무렵엔 뭘 알고 갔겠냐만은, 적어도 나이 열둘쯤 되고 나니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다. 여름이 아니면 항상 빨갰던 할머니의 코, 또 여름이 아니면 항상 솜옷 차림의 모습, 할머니가 스티로폼 박스 가득 채운 해산물을 건네줘도 엄마가 값을 치르지 않는 날이 많은 당연한 풍경. 그런 것들 말이다.
엄마와 할머니가 잠시 이야기도 하고 해산물을 보는 동안 나는 잠시 안쪽 의자에 앉아 있곤 했다. 장판으로 싸인 나무 의자 위에 작은 담요가 있었다. 해산물을 쟁여놓는 냉동고가 있었고, 혹여나 신선도에 문제가 될까 가게 안에 난로 하나 들여놓지 않았던 싸늘한 곳.
내가 동행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어시장 입구까지 데리고 가 새우튀김을 사주셨다. 보라색 앞치마 주머니에서 꼬깃한 지폐가 나와 새우튀김의 값이 됐다. 세상 돌아가는 추임새를 잘 알진 못해도 이때부터는 내가 느낀 그대로의 할머니를 대할 수 있었다.
밥상 위에 올라온 생선이 되게 귀하다는 사실, 어린 내가 새침 떠느라 살갑게 대하지 못하는 동안 손녀의 귀염을 보고 싶어 할머니의 애간장이 닳았을 거란 짐작, 고생스레 새벽 장사를 시작해도 자손들에게 먹거리는 넉넉히 주고 싶었던 그 노고를 상상하며 나는 청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됐다.
70세가 가까워 올 무렵에야 할머니는 장사를 그만두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돼서였다. 뭐랄까, 11년간 병상에 계셨던 할아버지의 몫까지 일하고 싶으셨던 건지 자손들이 만류해도 할머니는 어시장 일을 계속하셨다. 이미 성한 관절이 별로 없을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도 그러셨다.
오랜 장사 생활 덕인지 늘 총명하셨고 이해관계에 밝으셨으며, 말 한마디 허투루 하지 않는 반듯한 성정이셨다. 그런 성격이기에 더욱 일을 놓지 못하셨을 거다. 할아버지의 병원비나 자손들의 대소사에 내놓을 목돈을 직접 마련하려 무던히 애쓰셨고, 또 그렇게 하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일을 그만두시고 가게에 세를 놓으셨다. 그런 뒤에도 할머니에게는 계속 비린내가 잔잔히 깔린 포근한 체취가 있었다. 가끔 할머니를 웃게 해 드릴 요량으로 할머니 무릎을 베고 대자로 누워있거나, 밥상에 앉아 내 입에 반찬 넣어달라고 할머니 옆에서 입을 아- 벌리고 재롱을 떨 때도 잔잔한 비린내가 끼쳐왔다.
제 앞가림에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께 뭐 하나 제대로 갚은 게 없지만, 그나마 하나 기억하는 게 있다면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미숙한 솜씨나마 홍차 파운드케이크를 구워 갖다 드렸을 때였다. 관절이 다 상해버려 포크를 들기만 해도 손이 덜덜 떨리던 할머니는 용케 케이크를 몇 입 드시면서 “세상에, 빵에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니.” 그러시며 나를 뿌듯하게 바라보셨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있다. 사람은 늘 현존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깊이, 천천히 생각할 시간이 별로 없다. 대체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이제는 만나기 어려운 사람을 깊이 생각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오래 회상한다.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그리워할 날이랄 것도 없었고 명절과 집안에 경조사가 있을 때 얼굴을 비추면 도리는 다 했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그리고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 뒤에야 미련 맞은 회상을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년 하고도 반이 지났다. 가끔 버스와 전철에서 비린내가 끼칠 때는 어김없이 회상 모드다. 봉지 속 생선의 아우성과는 다른 종류의 비린내와 할머니의 품 냄새가 떠오른다. 죄송하다거나, 후회한다거나 그런 종류의 감정은 없다. 아마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딱 그 정도의 손녀일 테니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내가 절절하게 효도하는 손녀가 되거나 부모 속 한 번 안 썩히는 딸로 살 가능성은 별로 없을 테니까.
대신 그리워할 뿐이다. 이제 세상에 안 계신 할머니를 한 번씩 떠올리게 하는 비린내를 만날 때마다, 왠지 저 노을 너머 세계에서 굽었던 관절을 시원하게 펴고 쉬고 계실 할머니를 상상하며 또 남은 하루를 씩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할머니가 보내주신 생선과 조개와 게를 먹고 자란 생떼쟁이 손녀가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 세상을 살아간다고, 그런 말쯤은 전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