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십 년 넘게 살던 동네에는 우리 집처럼 딸이 많은 집이 몇 있었다. 우리 바로 앞집은 딸이 다섯인가 있었는데 여섯째로 태어난 막내가 아들이었고, 골목 안쪽에는 딸 셋에 넷째가 아들인 집도 있었다.
골목 안쪽 딸 부잣집의 큰 딸과 우리 집 둘째 언니의 나이가 같았다. 그렇다 보니 엄마들끼리도 잘 알고 지냈고, 나이가 같은 두 딸은 학원을 함께 다니거나 종종 공부도 함께 했다. 그렇다고 둘이 썩 친한 것 같진 않았다. 인근에 형편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 산다는 건 당사자에게 귀찮은 잣대 하나 늘어난다는 사실 중 하나다.
어른들의 시선에서 보자면 골목 안쪽 집과 우리 집의 차이는 딸을 셋씩 낳은 다음에 아들을 낳았느냐, 안 낳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 집엔 그런 아들이 하나 있었고, 우리 집엔 없었다. 아빠는 아들 타령을 참 끔찍이도 했다. 아마 엄마 나이가 환갑이 다 돼도 확실히 아들만 낳을 수 있다면 낳으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우리 집의 자식은 내가 마지막이었다.
골목 안쪽 집의 아주머니는 조금 늦은 나이에 막내를 낳으셨다. 그 집의 큰 딸이 중학생일 무렵 낳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낳은 아들은 집안의 보물이자 아주머니의 자부심이었을 테다. 부모 중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딸만 낳으면 설움 당하던 그 시절은 80년대였다.
아주머니는 아들을 애지중지 키우셨다. 아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예뻐 늘 입가에 자랑이 흘렀다. 우리 아들이, 우리 막둥이가……. 느지막이 낳은 아들이 오죽 예쁘면 그랬을까. 그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오죽 불편했을까. 여덟 살 남짓인 내가 봐도 엄마의 불편함은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어느 날은 아주머니와 담소를 나누고 돌아온 엄마가 집에 와서 또 불편함을 꺼내 보이셨다.
“참내, 골목 안쪽 그 집 말이야. 그 집 엄마가 점을 봤는데 아이가 열 돌이 될 때까지 생일마다 떡을 해먹여야 장수한다고 그랬대. 그래서 첫 돌 때부터 계속 생일마다 떡을 만든다지 뭐니.”
점쟁이의 말을 찰떡같이 믿는 아주머니가 우스운 건지, 똑같은 딸 부잣집 팔자에 아들 하나 얹은 것을 매일같이 자랑하는 아주머니가 못 마땅한 건지 과녁이 정확치 않았던 엄마의 불평이 얼마쯤 있었다. 하지만 점쟁이가 굿을 하라고 떠민 것도 아니고 그저 열 살 때까지 떡만 하면 오래 산다는데, 누구보다 예쁜 자식을 위해 떡 하는 게 눈에 날 짓은 아닐 것이다.
그 얘길 들었을 무렵 아이가 대여섯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은 5년 정도 떡을 더 만들면 아들이 장수한다는 말을 곧이 믿고 떡을 하는 아주머니는 얼마나 즐거웠을까. 내가 상상하는 아주머니의 속내는 이런 거다.
‘이렇게 매년 떡만 만들면 우리 막둥이가 장수한다 이거지.’
‘이렇게 떡만 해서 정말 막내가 오래 살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어?’
그리고 세상이 어찌 돌아가든 잘 놀고 잘 크기만 해도 효자였을 그 집 막내는 떡에 담긴 의미를 모른 채 넙죽넙죽 잘도 먹었을 테다. 포슬포슬하게 쪄낸 백설기는 귀한 아들의 장수를 기원하고, 어미로서 본분과 정성을 다하고 있다는 만족감을 채웠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그 얘기를 전하는 엄마는 불평이었지만 나는 그 어린것이 부러웠다.
‘그 집 아들은 태어나기만 해도 사랑받고 고마운 사람이고, 나는 그냥 또 딸인 거잖아.’
‘나도 생일에 엄마가 떡 해주면서 오래 살라고 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아빠의 아들 타령과 달리 딸 셋을 낳아 죄지은 것도 없으면서 죄지은 듯 살아야 했던 엄마가 내 생일에 떡을 할 리가 만무했다. 생일 케이크라도 받으면 다행이었다. 어릴 땐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제대로 받아보거나, 친구들을 초대해 파티를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내 생일 5일 전이 큰언니의 생일이었다. 항상 맏이라고 큰언니의 생일에 케이크를 사다 노래를 하면서 물건 살 때 덤으로 온 것 같은 내 생일을 위한 한 마디가 덧붙었다.
“며칠 있다 막내도 생일이니까 오늘 미리 축하한다.”
“원래 언니 생일 할 때 한 번에 하는 거야.”
어쨌든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골목 안쪽 그 집 아들이 받을 포슬포슬한 생일 떡이 얼마나 궁금하고, 또 간절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딱 한 번, 엄마가 집에서 떡을 한 적이 있었다. 나도 생일 떡을 만들어달라고, 내 생일 케이크를 사달라고 졸라도 꿈쩍도 안 하던 엄마는 겨우내 먹을 쌀을 쟁여놨다가 쌀벌레가 꼬여 못 쓰게 되자 그 많은 쌀로 떡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내 조름에 못 이겨 “그래, 우리 막내 생일 떡 한 번 해주마.” 했으면 평생 기억에 남았겠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엄마는 쌀벌레가 꼬인 쌀을 마당에 돗자리를 넓게 깔고 널었다. 쌀벌레는 햇빛을 싫어한단다. 징그럽게 생긴 허연 쌀벌레가 햇빛에 노출되자 꼬물거리며 모두 도망쳤다. 혹여나 벌레가 남았을까 엄마는 쌀을 고루 헤쳐 가며 살폈다. 벌레가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한 쌀은 빨간 고무 대야에 넣고 여러 번 씻어 불렸다. 깨끗해진 쌀은 고무 대야 위에 하얀 면포를 뒤집어쓰고 방앗간 갈 채비를 마쳤다.
당시에는 집에서 떡을 직접 만드는 게 흔했다. 동네마다 필수로 방앗간이 있었다. 엄마는 고무 대야 위를 잘 덮어 머리에 이고 방앗간에 가져갔다. 할 일 없던 나도 따라갔다. 방앗간에서는 그것을 고운 쌀가루로 만들어줬다. 쌀 구입부터 방앗간에 의뢰하는 경우도 있지만, 적어도 가루를 내는 공임 외에는 직접 수고스럽게 만드는 게 미덕이었던 시절이니 대부분 집에서 쌀은 준비해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끄러운 방앗간에서 털털털 소리를 내는 기계로 엄마가 가져온 쌀이 들어가고 뽀얀 가루가 파도에 씻긴 모래처럼 결을 보이며 내려온다. 남김없이 가루로 나온 것을 확인하면 엄마는 다시 고무 대야에 면포를 씌워 머리에 이고 나온다. 나도 다시 따라 나온다.
사진 속 앞줄에 바닥에 구멍뚫린 것이 시루. 어릴 적 집에 저렇게 생긴 시루가 장독대에 항상 있었다.
집에 돌아온 엄마는 옥상에서 시루를 꺼내다 씻었다. 어릴 적부터 봐오던 시커멓고 밑에 구멍이 숭숭 뚫린 항아리처럼 생긴 것이 실은 시루였다는 사실을 처음 안 날이었다. 거기에 젖은 면포를 깔고 빻아온 쌀가루를 얹어 습기를 탱탱하게 쐰 백설기를 만들었다. 쪄낸 백설기는 바로 먹지 않고 한 김 식혀 네모지게 썰었다. 잠시 식는 동안 겉면을 차지고, 속은 뜨끈함이 오래 남아 맛있는 백설기였다.
엄마는 백설기를 바로 주지 않고 조금씩 떼어내 손으로 살짝 뭉쳐 하나씩 내 입에 넣어주셨다. 그냥 뜯어먹으면 고슬고슬한 느낌이었을 백설기가 엄마 손을 잠시 거치고 나니 쫄깃하고 몽글몽글한 경단처럼 내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아들 태몽을 꾸고 기대하며 낳은 막내였다. 꿈속에서 새카만 돼지가 엄마 허벅지를 꽉 물고 놓지 않았단다. 망할 태몽 덕에 엄마는 아들 태몽을 꿔놓고 또 딸을 낳았다며 할머니로부터 온갖 구박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딸이 특별히 예쁜 구석이 넘치지도 않고, 사는 게 힘들어 거나하게 생일 챙겨줄 여력은 없지만 그저 어린 자식 입에 떡은 뭉쳐 넣어줄 수 있었다. 내리 딸만 낳아 자랑할 게 없으니 생일 떡이니, 케이크니 매번 챙겨줄 수 없었지만 어쩌다 만든 떡이라도 기분 좋게 먹일 수 있었다.
십 년 넘게 써본 적 없던 시루가 우리 집에서 습기를 풀풀 거리며 떡을 찌던 날, 엄마는 막내딸 생일 떡 먹이는 기분을 내고 나는 제대로 생일 대접받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그게 참 이제는 아득한 옛일이다.
이제는 그 옛날의 시루가 없고, 시루로 떡을 만드는 집도 찾아보기 어렵다. 한 번씩 잔치나 행사가 있을 때 맛보는 백설기나 팥 시루떡도 손이 가지 않는다. 대신 가끔 떡 생각이 나면 단골 떡집에 들러 스티로폼 그릇에 몇 조각, 몇 가닥씩 놓고 랩으로 꽁꽁 싸맨 떡을 산다. 이런 떡은 어쩐지 차갑다. 폴폴 나는 김을 눈으로 확인하지 못한 채 사 오는 떡은 추억을 만들 힘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