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맛 메뉴

야외에서 바람을 쐬며 먹는 그야말로 ‘낭만맛’

by 귀리밥

사람마다 선호하는 길거리 음식이 있다. 떡볶이와 어묵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가 있고, 내 남편의 경우 핫도그만 보면 눈을 떼지 못 한다.


언젠가 가족들과 소래포구에 놀러갔다가 나무젓가락에 끼워 숯불에 구워 파는 가래떡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게다가 소래포구는 노점의 천국이었다. 골목과 계단마다 양념 돼지껍데기와 막걸리 한 사발을 묶어 이천 원에 파는데, 그 엄청난 음식을 지나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하지만 마주칠 때마다 먹는다면 포구를 다 돌기도 전에 취해버릴 터. 술이 곁들여진 길거리 음식은 조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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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시장에서 사먹는 진한 색소의 슬러시와 미숫가루도 매력 있다. 유후인 여행 중에 사먹은 고로케는 갓 튀겨진 것이 하얀 종이에 싸여 나왔다. 입천장을 데일 정도로 뜨거운 속을 품고 있던 그 고로케는 내 인생에서 한 손에 꼽히는 고로케였다.


여러 길거리 음식 중에서도 나는 노점에서 사먹는 찹쌀 도넛과 꽈배기를 눈이 뒤집히도록 좋아한다. ‘찹쌀 도나스’라고도 부르는 찹쌀 도넛은 팥이 들어있지 않고 속이 텅 비어 있거나 찹쌀이 쫀득하니 차있는 것을 좋아한다. 손가락에 기름이 진득하니 묻어나고 입가에 설탕 묻히는 것도 예사롭게 만드는 음식이지만,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 순위에서 변함없이 1등을 차지하는 메뉴다.


학창시절 학교 매점에서는 찹쌀 도넛 하나에 200원씩 했고, 동네 재래시장에서는 갓 튀긴 찹쌀 도넛 8개에 천 원에 팔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하면 꿈의 가격이다. 요즘은 2개에 천 원 혹은 3개에 이천 원 정도, 그나마도 파는 곳이 없어 못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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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는 집에서 10분쯤 걸아가면 있는 대형마트 마당에 찹쌀 도넛 노점이 한 번씩 문을 열었다. 흔치 않은 기회라 5천원 어치 정도 사다먹곤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씹어 먹었는지 턱이 아플 정도였다. 몇 개월쯤 도넛이 먹고 싶어 그 마트에 장을 보러 갔는데 계약이 끝난 건지, 다른 데로 장사 터를 옮긴 건지 노점이 오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마음이 시들해졌다.


언젠가는 영화에서 서울대공원 가는 길목의 꽈배기가 등장해 인기였다. 대학 새내기들의 풋풋한 연애담을 보여주던 그 영화에서 뽀얀 얼굴의 여자 주인공은 서울대공원 가는 길목에서 사먹는 꽈배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노점 앞에 앉아 꽈배기를 대접에 담긴 설탕에 찍어 먹는 맛이 좋다며 환상을 만들어냈던 그 영화를 보고 꽈배기를 좋아하는 내가 서울대공원에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 봄 서울대공원 가는 길목의 노점에서 파는 꽈배기는 모두 소분돼 비닐봉투에 담겨 있었고, 설탕을 찍어 먹을 수 있는 노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그 꽈배기들은 직접 만든 게 아니라 어디선가 ‘떼 온’ 제품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점마다 다 같은 맛과 모양과 크기를 하고 있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러 봉지를 샀던 영화 속 꽈배기 환상은 훌훌 날아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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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좋아하는 길거리 음식인 찹쌀 도넛과 꽈배기는 집에서 만들어 먹기 어렵고, 어딘가 파는 곳이 있다 한들 가게 안에서 먹기엔 맛이 잘 살아나지 않는 메뉴라 더욱 끌린다.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종종 팔기는 하지만 그 맛은 거리에서 사 먹는 그 맛과 천양지차다. 벽과 유리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먹는 찹쌀 도넛이 아니라 엄지와 검지에 기름과 설탕을 묻히더라도 야외에서 바람을 쐬며 먹는 맛, 그야말로 ‘낭만맛’으로 먹어야 제 맛인 메뉴 아닐는지.


겨울이면 붕어빵도 낭만맛 메뉴에 합류한다. 땅콩과자와 호두과자도 마찬가지다. 예전에는 겨울철 간식을 사먹기 위해 현금을 들고 다녀야 했고, 어쩌다 노점을 만나도 현금이 없으면 아차, 하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얼마 전 놀라운 노점을 봤다. 정말 오랜만에 땅콩과자를 발견한 날이었다. 호두과자 노점은 어쩌다 만날 수 있지만 땅콩과자는 정말 하늘에 별 따기처럼 행운이 있어야 발견할 수 있는 노점 아닌가. 전시를 보기 위해 남편과 어느 터미널 앞에 내린 우리는 땅콩과자와 호두과자를 파는 노점을 만났다.


그런데 집에 현금을 두고 카드 지갑만 가져온 사실이 머리를 스쳤다. 현금 챙기는 게 뭐 대수라고 그걸 안 가져왔나 싶어 자신을 탓하고 있었다.

“여보, 나 저 땅콩과자랑 호두과자 너무 먹고 싶은데 현금을 안 가져왔어.”


남편은 잠시 둘러보더니 먹을 수 있다며 나를 노점으로 이끌었다. 놀랍게도 그 노점은 모바일 뱅킹을 받는 곳이었다. 노점 앞에는 모바일 뱅킹으로 연결되는 QR코드가 인쇄돼 붙어있었고, 남편은 능숙하게 돈을 송금했다. 노점에 앉아있는 주인은 실시간으로 입금을 확인하더니 자연스레 과자를 구웠다.


땅콩과자 틀 두 개와 호두과자 틀 두 개가 바삐 돌아갔다. 나처럼 땅콩과자의 희귀성을 아는 사람들이 이미 쓸어 갔는지, 호두과자는 여분이 꽤 있음에도 땅콩과자는 텅 비어 있었다. 내가 먹게 될 땅콩과자를 굽기 위해 주인아저씨는 틀에 반죽을 살짝 붓고 반씩 쪼갠 땅콩과 연보라색 앙금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다시 반죽을 얇게 붙고 과자 틀을 덮는다. 초시계로 시간을 딱 맞춰가며 과자 틀을 뒤집는다. 그 과정을 지켜보며 기대감은 무럭무럭 자랐다.


이윽고 땅콩과자가 다 익었을 무렵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퍼포먼스를 만나는 순간이다. 장갑 낀 주인아저씨의 두 손가락이 땅콩과자를 재빠르게 떼어내는 퍼포먼스! 얼핏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빠르고 경쾌하게 땅콩과자를 떼어낸다. 아주 어릴 때부터 땅콩과자를 파는 노점에서는 모두 똑같이 배운 것처럼 그렇게 두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듯 그렇게 과자를 떼어냈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를 보고난 후 1분 내로 고소한 땅콩과자는 내 입에 들어온다.

20191104_105009.png 정말 오랜만에 맛본 땅콩과자와 호두과자

갓 구운 땅콩과자와 호두과자에 댈 것이 무엇인가. 식으면 맛이 뚝 떨어지니 갓 구워내 뜨거운 채로 먹어야 맛있다. 남편은 땅콩과자를 처음 먹어본다고 했다. 나도 초등학교 이후로는 땅콩과자 먹어본 일이 별로 없으니, 못 먹어봤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우리는 미술관으로 걸어가며 영하의 겨울바람 속에서 앞니에만 뜨거움을 전하는 땅콩과자와 호두과자를 먹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 진짜 맛있다!”


하지만 머리가 휘날리도록 출렁거리는 겨울바람, 흔치 않은 메뉴를 발견했다는 기쁨, 주인아저씨의 손놀림 퍼포먼스, 땅콩과 앙금을 아끼지 않고 넣었던 푸근한 솜씨 중 무엇하나라도 빠졌다면 땅콩과자는 제 맛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실내의 가게에서 사먹었다면 결코 만날 수 없을 낭만맛이다.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 낭만맛 메뉴의 경험은 모두 미세먼지가 없거나 보통 수준인 날들이었다. 겨우내 강추위 아니면 미세먼지를 오가며 쉴 새 없이 우리를 들들 볶는 날씨 탓에 즐거움을 느낄 겨를이 부족하다. 계절감을 느끼며 거리를 걸을 수 있어야 길거리 음식들도 제 매력을 충분히 발휘할 터.


요즘 우리가 사는 이곳의 날씨는 길거리 음식들에게 매력발산 기회를 주지 않는다. 참으로 야박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미세먼지가 ‘매우 나쁨’을 기록하는 날이면 한철 장사를 위해 거리로 나온 노점 주인들의 주머니 사정도 매우 나쁠 것이다. 낭만을 사먹고 싶은 사람이나 낭만을 팔고 싶은 사람이나 이 계절이 혹독하고 얄밉기는 매한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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