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꿈을 꾼 것만 같은 엄마의 중산층 놀이
하루아침에 집이 커졌다. 네 살 때 일이었다. 분명 우리 다섯 식구는 단칸방에 화장실이 밖에 있고, 아궁이 자리가 남아있는 입식 주방이 딸린 아주 작디작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차를 타고 내린 커다란 양옥집 앞에서 엄마는 “여기가 우리 집”이라고 했다. 순식간에 방 4개에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 온 것이다. 나고 자란 곳이 늘 단칸방이었기에 네 살배기 내가 바라본 이 거대한 집구석이 우리 집이라는 게 낯설었던 시절. 그 이사에는 여러 사연이 있었다.
이런 사연이야 모두 말길을 알아먹을 나이쯤이나 돼서야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이다. 당시 나의 큰언니가 단칸방 집이 있던 동네의 작은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족족 100점, 공부와 운동에서 매번 1등을 했고 학교에서도 “이 아이를 보다 학군이 좋은 데서 키우셔야 한다.”라고 제안했단다.
이제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이 1등을 하는 게 평생 가는 호재가 아닌데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셨다. 큰언니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 인천에서 나름 학군이 좋다는 지역으로 이사를 결행하신 거다.
단칸방에서 그 넓은 집으로 가려면 돈이 꽤나 필요했는데, 아빠의 벌이는 평생 시원찮았고 엄마는 전업주부였다. 오죽 가난했으면 인천 앞바다 갯벌에서 캐온 조개로 젓갈 담가 밥 먹고 살았을까. 결국 장사를 하시던 외할머니가 돈 마련을 거의 해주셨다고 한다.
그렇게 이사 온 동네는 우리 집처럼 모두 1~2층 단독주택으로 구성돼 있었다. 3층짜리 집으로 들어가는 정원이 굽이굽이 정돈돼 있는 몹시 잘 사는 것으로 보이는 단독주택도 꽤 많았다. 아마 그 순간은 우리 가족이 몹시 빈곤한 단계에서 중산층으로 향하는 허들을 넘으려던 찰나가 아니었을까.
갑자기 커진 집에는 단칸방에서 쓰던 살림을 갖다 쓸 만한 게 별로 없었다. 좋은 가구, 번듯한 가전을 채우고 평생 없던 자가용도 마련했다. 아빠는 새로 공장을 차려 제대로 돈벌이를 시작하려 했고(하지만 제대로 버신 적은 없으셨다.), 엄마는 맞벌이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셨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된 큰언니는 이런저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둘째 언니는 나름의 특기를 살려 운동부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운동장에 잔디가 깔린 커다란 유치원에 입학했다.
물론 집이 바뀌었다고 삶의 질이 갑자기 좋아질 리 없다. 이런 변화는 모두 부모님이 한 몸 부서져라 일하며 채워간 것들이다. 아빠보다는 엄마의 몸이 부서질 듯 고됐던 시절. 본인이 이루지 못한 학업의 꿈을 자식에게서 한 번 보고 싶다며 큰언니에게 ‘의사 딸내미’를 기대했던 엄마였다.
그러다 보니 허울 좋은 집구석에 자식들도 이럭저럭 누리며 살고 있었지만 사실 우리 집은 제대로 속이 빈 강정이었다. 동네 사람들과 어울릴 때도 우리 집은 늘 속이 휑뎅그레했고, 엄마의 가게가 자리를 잡고 돈을 잘 벌기 전까지 우리의 생활상은 단칸방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찬의 가짓수가 으리으리하지 않았고 모든 간식은 집에서 엄마가 만들어 먹이셨다. 야채 값을 아낀다고 텃밭을 일구셨고, 몽당연필을 볼펜 깎지에 끼워 쓰거나 한 번 쓴 종이를 지우개로 지워 다시 쓰는 식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절약 방식은 온 가족이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어설프게 중산층의 허들을 넘으려던 우리 집이었기에 온 가족이 고단했건만, 한 번씩 엄마가 중산층의 기분을 내는 날이 있었다. 엄마는 모든 간식을 직접 만들어주셨는데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면서도 돈을 바짝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 년에 두어 번 동네에 햄버거 재료와 아이스크림 차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지갑을 들고 총총히 나가 중산층 아낙의 얼굴로 동네 길가에 섰다.
햄버거와 아이스크림 재료를 파는 차라니.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당시에는 ‘외국 음식’ 느낌이 물씬 나는 두 메뉴의 재료를 파는 게 적당히 어울리고 차밍했다. 햄버거 재료는 햄버거의 윗장과 아랫장에 들어가는 빵 10 세트와 패티 10장을 함께 파는 것이었다.
그 메뉴는 당시 유행처럼 동네 아주머니들이 잔뜩 사서 가족들에게 해주는 ‘신식’ 간식이었다. 빵은 그저 따뜻할 정도로만 굽고 중간에 들어가는 패티는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속까지 잘 익도록 굽는다. 그 사이에는 상추를 넣고 케첩을 뿌렸다. 이렇게 쓰고 나니 너무나 빈약한 햄버거 같지만, 벌써 30년도 훨씬 전의 메뉴이니 지금의 햄버거와는 비교 불가다.
어쨌든 햄버거 재료가 싼 것도 아니었는데 대형마트가 흔한 시절이 아니라 판매 차량의 녹음된 방송 소리가 울려 퍼지면 집집마다 엄마들이 달려 나와 여러 봉지 사곤 했다. 엄마는 평소 직접 해주는 간식만 먹이다가 새로운 메뉴를 먹일 겸, 중산층 여인들의 틈새에 껴 기분도 낼 겸 어쩌다 한 번씩 햄버거 재료를 샀다.
엄마가 햄버거 재료를 사들고 오면 나는 주방에서 엄마 다리에 매달려 햄버거를 기다렸다. 굽고 또 굽고, 그것을 한 데 모아 햄버거를 만드는 과정이 마법처럼 1초 만에 완성되길 바랐다. 기다렸던 햄버거가 완성되고 한 입 가득 베어 물면 이런 것을 햄버거라 부르는구나, 하며 세상 행복한 얼굴로 다음날 유치원에 가서 햄버거 먹은 자랑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다.
햄버거 재료를 파는 차에서는 아이스크림도 팔았다. 딸기, 바닐라, 초코 세 가지 맛인데 한 가지 맛을 선택하거나 믹스로 살 수도 있었다. 이 아이스크림은 김치 통만큼 큰 통에 가득 들어있었고, 통 단위로 구입해야 했다.
물론 슈퍼에서 쮸쮸바 하나에 50원에 사 먹던 시절에 그 아이스크림을 사려면 엄마는 굉장한 내적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지난한 내적 갈등을 겪은 엄마가 햄버거 재료에 인심 써서 아이스크림까지 사는 날이면 나와 언니들은 행복대잔치였다. 냉동실 한 칸을 그득하니 채운 아이스크림은 색소가 잔뜩 들어가 선명한 색을 띠고 있었는데, 유치원에 다녀오면 언니들과 밥숟갈로 이것을 퍼먹느라 경쟁이 붙곤 했다.
그렇게 참 많은 것을 먹으며 자라고 또 자랐다. 푹푹 먹고 자란 만큼 엄마의 맹모삼천지교와 중산층의 로망이 이루어졌으면 좋았으련만, 언니들은 의사와 선수의 길을 가지 못했고 나 역시 엄마의 바람이었던 교사의 길을 가지 못했다.
꾸역꾸역 이사를 가고 마음속에 큰 꿈을 갖고 억척스럽게 때로는 중산층의 기분을 내며 살던 엄마는 이제 주부가 된 세 딸들의 살림살이를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딸들이 모두 시집간 뒤에는 집도 아담하게 줄여 이사를 가셨다. 이제 먼 옛날의 양옥집은 없다. 한바탕 꿈을 꾼 것처럼, 중산층 놀이를 한 것 같은 기억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 햄버거 재료며, 색소 가득한 아이스크림을 생각하면 ‘중산층’을 향한 염원이 떠오른다. 한 입 베어 물면 혀 위에서 감쪽같이 녹아 사라지듯 엄마의 염원들이 흩어진다. 이제와 그 시절 햄버거와 아이스크림을 먹게 된다면 아마 한 입 먹고 손 떼고 싶을 맛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딱 한 입만 먹고 아쉬운 시절을 향해 조금 울고 싶긴 하다.
덧. 가끔 아빠가 떼를 써서 본인 햄버거에 패티 두 장을 넣어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고작 네다섯 살이던 나지만 ‘저러면 나중에 빵만 두 장 남는 건 누구 먹으라고 저러지?’라고 속으로 흉을 봤다. 물론 남는 빵은 누군가 먹어치운 것 같긴 한데 잘 기억나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