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카레와 토마토 카레

그저 오늘 딱 하루 맛있었다고 느낀다면 더없이 충분한 맛.

by 귀리밥

어느 해의 설날이었다. 간소한 아침을 차려먹고 시가로 향했다. 영하 10도 안팎의 추운 날이라 두꺼운 옷을 부득부득 껴입고, 명절 선물을 챙겨 전철에 올랐다. 집에서 시가까지는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 반. 보통 점심을 함께 먹고 차 한 잔 마신 뒤 나와 친정으로 이동하는 일정이기에 혹여나 어르신들의 점심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이날은 시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맛보는 날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내는 집이 아니고 손님이 몰려드는 분위기도 아니라 시어머니는 우리가 방문했을 때 함께 먹을 정도의 양으로 음식을 장만하신다. 어느 명절이고 빠지지 않는 갈비와 전 한 가지, 나물과 국을 놓고 밥을 먹는다. 식사 후에는 차에 과일을 곁들인다.


그런데 그 해 설날에는 조금 특별한 메뉴가 준비됐다. 갈비와 나물과 국은 빠지지 않고 있는데, 의외의 메뉴인 카레라이스가 등장한 것이다. 나는 식탁 위에 놓이는 카레라이스에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절에 웬 카레?’


물론 명절이라고 모두 같은 음식을 먹을 필요는 없다만 뜬금없긴 했다. 온 식구가 기독교인 친구네 집은 제사나 명절 풍습에 느슨한 편이라 여러 날 쉬는 연휴에 직접 탕수육을 해 먹거나 질 좋은 고기를 굽는 정도라고 들은 적이 있긴 하다. 결혼 전 다른 친구도 명절 음식을 때맞춰 먹어본 적이 없다며 연휴 막바지면 항상 우리 집에 와서 전이며 잡채를 한껏 먹고 갔다. 그러니 반드시 명절에 기름 냄새 지지고 볶아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카레라이스라니. 은근히 고루했던 내겐 문화충격이었다.


어머니는 우묵한 접시에 밥과 카레를 소복이 담아 두 그릇을 만드셨다. 시부모님과 우리 부부 넷이서 먹는 식탁이니, 각 부부가 하나의 카레라이스를 함께 먹는 거였다. 물론 평소 하시듯 명절 음식과 밥, 국은 각자 받았고 카레라이스는 마치 간식이나 반찬처럼 나온 상태였다.


카레라이스를 보는 눈길에 어머니는 얼른 설명해주셨다.

“준이(내 남편)가 어릴 때부터 카레라이스 좋아했잖니. 그래서 엄마가 만든 카레 맛 좀 보라고 만들어봤어. 밥이랑 국은 따로 먹고 카레는 맛이나 보라고 조금만 떴다.”


특별한 마음을 담아 만든 카레라이스였다. 시판되는 카레 분말의 맛은 비슷해서 어느 집에나 있을 만한 음식이긴 하나, 자주 방문하지 않는 큰아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명절에 한 그릇 먹이고 싶었던 시어머니의 마음만큼은 카레의 격을 한층 상승시켰다. 나는 한 숟갈 떠먹으며 맛이 좋다고 감탄했다.

“어머니, 카레 정말 맛있어요. 어머니만의 레시피가 있나 봐요.”

“아니야, 그런 건 없어. 그냥 늘 하던 대로 만든 거야.”


그렇게 답하시면서 시어머니는 남편의 얼굴을 구석구석 바라봤다. 며느리가 맛있다고 추임새를 넣었으니 아들도 한 마디 했으면 싶은데, 큰아들은 말 한마디 없이 제 앞에 놓인 음식만 묵묵히 먹고 있으니 말이다.

식사 후에는 과일과 차를 곁들여 먹었고, 차를 마신 지 40~50분쯤 됐을 땐 더 늦기 전에 친정에 가라며 자리를 정리하셨다. 시가든 친정이든 오래간만에 온 자식 내외들이 최대한 오래 머물고 가길 바라는 마음을 내색하는 집이 많다던데, 다행히 나의 시부모님은 그런 면이 없어 명절에 불편이 덜하다.


시가에서 나와 다시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남편에게 카레라이스에 대한 소감을 물었다.

“여보가 어릴 때 카레를 좋아했구나. 오늘 오래간만에 먹어보니 어땠어? 어머니표 카레라이스?”

그랬더니 남편은 짧고 간결한 답을 들려줬다.

“그냥 카레 맛이던데?”


시가에서 받은 문화충격에 이어 평소답지 않게 무뚝뚝한 남편의 답에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무슨 말이 그래. 자기 온다고 어머니가 일부러 만드신 것 같던데.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면 뭔가 다른 카레보다 특별하게 느끼는 거 아니었어?”


이번에는 강렬하면서 직설적인 답을 들려준다.

“아니야. 옛날에 엄마가 그냥 반찬 하기 귀찮아서 카레 한 솥단지 끓인 거야.”


남편의 답에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시어머니에게는 아들과의 애틋한 메뉴가 카레라이스였는데, 그 아들은 밥해주기 귀찮았던 엄마가 질리게 끓여둔 음식이었다니. 세월이 잔뜩 흘렀으니 진위를 가려내는 건 아무 의미 없었다. 시어머니 마음속 카레라이스는 참으로 맛있고 부드럽지만, 남편에게는 똑같은 분말을 넣어 만든 ‘그냥 카레 맛’이었다.


같은 소재와 시간을 두고 사람마다 다르게 기억하고 간직하는 일이야 세상에 얼마든지 일어난다. 기억은 저마다 달라서 시간이 훌쩍 지나 기억을 논할 때 당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나를 어여쁘게 추억해주는 어르신이 “너 어릴 때 이것 참 잘 먹었지?”라고 해도 아무 기억이 없을 때, 언젠가 내가 특정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고 느낀 누군가가 나를 만날 때마다 그 음식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할 때면 당혹감을 감추느라 애를 먹는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노랫말이 있다. 각자 갖고 있는 추억의 두루마리를 대조한다면 얼마나 엉뚱할지, 사실 나는 그 음식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그들이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니 혼자 먹는 음식이 아닌 이상 함께 먹는 음식을 만들거나 대접할 땐 훗날 좋은 기억으로 남지 않더라도 오늘 하루 즐겁게 맛보는 데서 만족을 끝내고 싶다. 음식을 만드는 수고로움이나 얼마나 좋은 재료가 들어갔는지,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는지, 그런 세세한 것을 따지지 말고 그저 오늘 딱 하루 맛있었다고 느끼는 것까지만. 딱 거기까지만 욕심내고 싶다.

토마토 카레를 찍어놓지 않아 최근 만들었던 마늘카레의 사진을 올려봅니다.

마침 오늘은 토마토 카레를 만들었다. 토마토가 제철인 여름이다. 단단하고 과즙이 꽉 차오른 토마토를 잘게 썰었다. 양파도 잘게 썰고 마늘은 딱딱한 꽁지만 썰어버리고 통으로 준비한다. 돼지고기 대신 담백하게 닭 안심을 작게 썰고, 버섯을 넉넉히 썬다. 토마토를 제외한 나머지를 올리브유에 볶다가 물을 넣고 치킨스톡 한 조각을 풀어 넣는다. 여기에 준비한 토마토를 넣고 한바탕 끓인 다음 카레 분말을 넣어 잘 섞는다. 이렇게 여름에 제일 맛있는 토마토 카레 완성.


저녁에 남편과 토마토 카레로 식사를 했다. 남편은 토마토 카레 먹고 싶어서 빨리 집에 왔다더니, 정말 맛있게 삭삭 비웠다.

“토마토 카레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어. 내 스타일이야!”

“그래? 그렇게 맛있어?”


하지만 나는 안다. 언젠가 시간이 훌쩍 지나 남편의 추억 두루마리엔 ‘어디에나 있는 카레’에 토마토 카레가 포함될지 모른다는 걸. 한참 지난 뒤 내가 “여보, 그때 토마토 카레 정말 맛있다고 좋아했잖아!”라고 하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냥 카레 맛이었는데?”를 되돌려 받을 수도 있다는 걸.


그래도 서운해 하진 않겠다. 오늘 하루 맛있게 먹고 즐거웠다면 토마토 카레는 제 할 일을 충분히 한 거다. 나 역시 신선한 여름 토마토로 만든 카레가 맛있었고, 함께 먹을 수 있어 좋았으니 됐다. 저마다 다르게 적힐 미래의 토마토 카레까지는 도무지 책임질 수가 없다.

이전 13화잔치니까 잔치국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