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인기투표

내 마음속 주방용품의 베스트와 워스트

by 귀리밥

불쾌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우울함이 발목을 집어삼키는 순간이라도 내가 눈을 떼지 못하는 게 있다면 바로 그릇이다. 그릇이며 포크며, 앞치마며 주방용품은 신비하리만치 내 눈을 톡톡히 잡아끈다. 그러니 혹 내게 잘못한 게 있거나, 과거의 잘못을 고할 사람이 있다면 주방용품 하나 들이밀고 말을 시작해야 술술 넘어갈 수 있단 얘기.


한 번씩 싱크대의 모든 문을 열고 내가 소유한 주방용품을 바라본다. 이사 올 때만 해도 이 정도면 넉넉하겠다 싶었던 주방이 차츰 좁게 느껴지고, 어디라도 그릇장을 욱여넣을 공간을 궁리하게 된다.


여행을 가거나 예쁜 숍에 갔다가 정말 발바닥이 따끔거릴 정도로 몸서리쳐지게 갖고 싶은 그릇이나 컵이라도 만나면 이미 많은 짐을 짊어진 싱크대에게 사과의 텔레파시를 보낸다.

‘싱크대야. 미안한데, 오늘은 못 참겠어. 또 욱여넣어야 할 것 같아.’


집에 돌아와서는 싱크대 문을 활짝 열고 가진 것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겨가며 공간을 쥐어짜 낸다. 자기 암시일 수도 있겠다만, 이렇게 싱크대에 죄책감을 느끼면서까지 사온 그릇들은 늘 만족스럽다.


한편으로는 우겨가며 사놓고도 손이 잘 가지 않아 냉랭한 대우를 받는 물건들도 있다. 사 올 때는 길바닥에서 발버둥 치며 좋아해 놓고, 정작 잘 쓰지도 않는 나의 태도에 그 물건들은 입이 부루퉁할지도 모르겠다. 이런저런 물건들을 생각하며 오늘은 내 마음속 주방용품의 베스트와 워스트를 골라봤다.


가시는 어디로 갔니, 나무주걱

신혼살림을 장만하던 때, 알록달록한 실리콘 조리도구를 구입했다. 음식에 닿는 부분이 선명한 원색의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조리도구가 전용 거치대에 걸린 세트상품이었다. 거치대는 빙글빙글 돌아가며 필요한 도구를 꺼낼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이게 우리 집과 사이즈가 안 맞았는지 싱크대 턱 위에서 툭하면 떨어졌다. 한 번은 요리 중이던 중화 팬 위로 쏟아져 혼비백산했다. 게다가 7종 세트 중 쓰임새가 좋은 건 두어 가지뿐이라 불안한 덩치를 감당할 가치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 갈 때는 깔끔히 정리하고 필요한 도구만 새로 장만하기로 했다.


이때 새로 산 것이 국자, 뒤집개, 나무주걱이다. 다른 건 몰라도 나무주걱은 책의 영향을 꽤 받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타샤 할머니가 잼을 만들거나 냄비 속 요리를 저을 때 나무주걱을 즐겨 사용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침 살림살이를 사러 방문한 이케아에서 딱 좋은 나무주걱을 만났다. 목이 길고 음식에 닿는 머리 부분은 간결했다.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주걱의 머리 부분이 뜨끈한 음식을 휘휘 저으며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달랠 수 있겠지. 가격도 흡족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구입한 나무주걱은 한동안 나를 몹시 못살게 굴었다. 허구한 날 가시가 손에 박혀서였다. 굵은 가시는 아니고 잔가시가 손을 콕콕 찔러대는 통에 요리 중에 깜짝 놀라곤 했다. 남들은 잘만 쓰던데, 게다가 타샤 할머니도 쓰던데! 왜 나는 나무주걱이 어려울까 의아했고, 요리할 때 손이 잘 가지 않았다. 그래도 쓰임새로 보나 크기로 보나 나무랄 데 없는 나무주걱이니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낸 어느 날, 카레를 만들던 나는 나무주걱에 카레가루를 얹고 숟가락으로 풀고 있었다. 한참 가루를 풀던 나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 이 나무주걱이 언제 이렇게 부드러워졌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무주걱은 까칠함을 잠재우고 내 손에 알맞게 길들여져 있었다. 가시에 찔린 기억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매끄럽고 단단하게 길들여진 나무주걱에 감탄했고, 가루를 다 푼 카레를 휘휘 저어가며 저녁식사를 완성했다.


어쩌면 내가 잔가시에 놀랄 때 주걱도 놀랐으려나. 조심스레 나무주걱을 드는 나를 보며 주걱 역시 온몸을 가다듬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은 주방에서 매우 높은 사용빈도를 자랑하며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주걱의 머리 부분이 조금 닳았다.


왜 이제야 내게 왔을까, 유리 티팟


예쁜 도자기 티팟을 세 개 갖고 있었다. 한 개는 미녀와 야수 그림이 들어간 티팟, 하나는 전통 다기세트에 들어있는 티팟, 하나는 1인분 차를 우리기 좋은 미니 티팟. 유리 티팟은 커피 드리퍼와 세트로 하나 들인 정도였다.


그런데 티팟을 살 때 내가 크게 고려 안 한 부분이 차망이었다. 사실 차를 우릴 때 차망이 핵심이라면 핵심인데, 그걸 생각지 못하고 모양만 보고 산 것이다. 촘촘한 차망이 있어야 찻잎의 작은 부스러기들이 찻잔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통 티팟은 차가 빠져나가는 주둥이의 연결 부분에 구멍이 있어 찻잎을 걸러낸다. 그런데 도자기는 쇠로 만든 티망만큼 촘촘할 수 없기에 늘 작은 찻잎 부스러기가 찻잔에 들어와 찝찝함도 우려냈다.


고민 끝에 2~3인분의 차를 내려도 거뜬한 분량에 촘촘한 차망이 들어있는 실용적인 티팟을 구입하기로 했다. 열심히 검색을 거듭한 끝에 구입한 사마도요 유리 티팟은 내가 원하는 바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길쭉한 몸매에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듯 촘촘하게 빠진 차망이 가운데 위치한 티팟. 남편과 둘이 마시는 차를 우리거나 친구들과 여럿이 마시는 차를 우릴 때 적당한 양. 군더더기 하나 없는 디자인에 설거지도 간편한 구조. 아,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티팟이다.


티팟 속 차망에 상해에서 사 온 녹차 잎을 두 스푼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붓는다. 차망 속 찻잎과 뜨거운 물이 무아지경 상태로 혼합되며 향긋한 녹차가 되면 함께 한 인원이 몇 명이든 녹차를 넉넉히 나눠마신다. 정말 좋다, 너무 좋다. 이 유리 티팟은 좀 더 일찍 만나도 좋았을걸.


1인용 기분 제대로 내고 싶을 때, 사각 접시

“이거 이쁘지? 어?”

내가 재차 물을 때 남편은 시큰둥했다.

“집에 있는 다른 거랑 비슷한데?”

“이게 어떻게 비슷해. 집에 있는 접시들은 모두 동그란데 이건 네모잖아!”


갑자기 내가 먼 옛날 유행가 ‘네모의 꿈’을 대변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사각 접시를 찬미하는 모양새였다. 여전히 남편은 시큰둥했고, 나 혼자 사각 접시에 반해버려 두 개를 구입했다.

“안 되겠어. 역시 사야겠어!”


그렇게 우리 집 싱크대에 몸을 들인 사각 접시는 보통의 찬기보다 조금 양이 많은 반찬, 몸이 작은 생선구이 등을 담기에 참 좋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무늬와 잔꽃무늬는 담긴 음식에 활기를 더한다.


하지만 반찬을 담을 때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용도가 있다면 1인용 기분을 내고 싶을 때다. 집에서 일을 하는 날이 많다 보니 점심은 혼자 차려 먹곤 한다. 그중 메인으로 먹는 반찬, 예를 들어 두부를 바싹 구워 참깨소스를 뿌린다거나 조금 남겨둔 제육볶음, 혹은 1인분의 과일을 놓을 때 사각 접시의 존재감은 상당하다.


1인분을 담을 때 대단한 접시라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남편이 회식을 하거나 출장을 가 혼자 식사를 하는 저녁이면 사각 접시에 딱 맞는 양의 안주를 담고 캔맥주를 하나씩 먹곤 한다. 안주는 주로 비스킷이나 과일, 견과류다. 사각 접시가 넘치면 과하고 이보다 작은 찬기에 담으면 나를 덜 대접하는 것 같다. 혼자 있는 기분을 크기와 무게로 잴 수 있다면 이 사각 접시가 기준이 되지 않을까. 이제 사각 접시 없는 1인용 기분은 상상조차 어렵다.


요새 이거 없는 집 없잖아요, 리넨

이케아에 갔을 때 사람들이 꼭 하나씩 사는 게 있다면 리넨이다. 쓰임새가 다양하다고 들었다. SNS를 봐도 그렇고 인테리어 사진을 봐도 리넨 없는 주방이 거의 없다. 집집마다 리넨 천국이다. 뭔가 쓸 곳이 많으니까 이렇게들 사는 거겠지 싶어 나도 샀다. 그것도 여러 장.


그렇게 이삿짐에 실려 지금의 집으로 온 리넨은 3년째 내게 속내를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 써야 속 시원한지, 어떻게 써야 정말 잘 쓰는 건지 감이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느 집이든 리넨이 빠지지 않는 것 같아 나는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허연 바탕에 체크무늬가 담긴 리넨은 행주로 쓰기엔 매번 세탁이 귀찮고, 주방 수건으로 쓰자니 흡수력이 별로다. 주방가전의 커버로 쓰는 집도 있는 모양인데, 나는 가전 위에 무언가 덮는 게 번거롭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은 커피머신 밑을 받쳐놓는 용도로 쓰거나 오븐에서 갓 꺼내 뜨거운 접시를 식탁 위에 놓을 때 쓴다. 커피머신 밑에 받쳐놓은 것은 한 번씩 세탁할 때만 내 손에 닿고, 어쩌다 오븐에서 나온 그릇을 받치는 리넨은 한 달에 두어 번 내 손길을 받는 정도다. 그 외 시간에는 서랍 구석에서 쿨쿨 잠만 자는 리넨들이다.


하지만 남들 다 잘 쓰는 리넨의 진가를 아직 모르겠다. 어느 날 리넨이 “이렇게 괄시당하며 살 순 없어요.”라며 쪽지를 남기고 집을 나간다 한들 붙잡을 여력도 없다. 우리 집에선 생각보다 인기 없는 리넨들이 렌지대 첫 번째 서랍에서 푹푹 세월을 보내고 있다.


진짜 건강한 거 맞지? 대나무 그릇

왼쪽 푸른색 접시가 대나무 그릇

아는 동생이 일본 여행을 다녀와 SNS에 올린 그릇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대나무 섬유로 만들었다는 뽀얀 그릇이었다. 특별히 염색처리를 하거나 화학약품을 쓰지 않아 안전하다고, 아이들 이유식 그릇으로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무조건 대나무 그릇을 사고 싶어 졌다. 대나무 그릇만 있다면 건강하고 순수한 상차림이 가능할 거란 기대감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여러 날 검색 끝에 대나무 접시 큰 것 두 개와 작은 접시 하나, 컵 두 개를 샀다. 파스타와 피클을 담아 먹거나 과일을 담아 먹어도 좋겠다는 계산이었다. 평소 물컵으로 쓰면 가벼워 편할 거란 계산도 포함이다. 디자인 역시 흡족했다. 그런데 사용설명서에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글귀가 있었다.

“너무 뜨거운 음식을 담지 마세요, 색이 진한 음식을 담지 마세요, 사용 후에는 즉시 씻어주세요, 물기가 오래 닿으면 안 됩니다.”


아니, 무슨 그릇이 이렇게 요구사항이 많담. 그리고 그 투정은 이내 현실로 다가왔다. 파스타를 만들어 막상 담으려니 소스 색이 신경 쓰였다. 프렌치토스트를 담으려다 뜨거운 음식을 담지 말라는 말이 걸려서 다른 접시에 담았다. 사용 후 즉시 씻으란 말은 식사 후 나를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싱크대에 세워는 마법의 문구였다. 물 한 잔 마시고 나면 당장 씻어 말려야 할 것 같아 심란했다.


마치 대나무 그릇이 나를 감시하며 자꾸 움직이게 만드는 기분이랄까. 구입 후 2주 정도 대나무 그릇을 쓰던 나는 노이로제에 걸리기 직전까지 갔다. 게다가 무심결에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담았던 대나무 컵은 잠깐 담가 둔 사이 갈색 물이 들어 세상 더러운 티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대나무 그릇이 아니었다.


지금은 싱크대 밑의 칸, 저 구석에서 대나무 그릇이 도를 닦고 있다. 언젠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이따금 손님이 오는 날 과자를 담는 정도로 바깥출입을 한다. 하지만 이런 미약한 역할로 빽빽한 우리 집 싱크대에 존재하기 어려울 터. 조만간 대나무 그릇은 쫓겨나지 않을까 싶다. 그도 아니면 대나무 그릇이여, 내게 임대료를 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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