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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31. 2019

샤프심이 전부였던 시절

단돈 200원이면 일주일을 버티는 선택지

남편과 나는 아이를 낳아 키울 계획이 없는 딩크 부부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결혼 전에는 ‘우리도 아이 한 명쯤은 낳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서로의 교육관에 대해 긴 시간 대화한 적도 있고, 자녀가 있는 우리의 가정을 상상해본 적도 많다. 그때 자녀가 생긴다면 ‘이것만은 꼭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이야기한 적 있다. 남편은 운동을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아이가 나처럼 검도를 했으면 좋겠어. 같이 도장도 다니고.”

“여보랑 아이랑 똑같은 도복 입고 있으면 귀엽겠네.”

“응. 나는 어릴 때부터 운동 배우는 게 참 좋더라. 여보는 뭘 가르치고 싶어?”

“음, 나는 가르치고 싶은 건 없는데 가르치기 싫은 건 있어.”

“그게 뭔데?”

“글자.”


글자라는 게 알기 전에는 구불구불, 네모 각지거나 동글동글한 형태로 주변과 어우러져 있지만, 알아버리고 나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어쩔 수 없이 글자나 숫자가 먼저 들어오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습성이다. 대신 글자를 배우면 놓쳐버리는 풍경들이 있다. 만약 자녀가 있다면 글자는 최대한 늦게 배우며 세상을 다채롭게 흡수하길 바랐다. 남편이 다시 물었다.


“그럼 여보는 어릴 때 배운 것 중에 재밌는 것 없었어?”

여기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나는 학교에서 배운 것 말고는 딱히 없는데.”

“피아노나 뭐 악기 그런 것 없었어?”

“응. 나는 학교 교과목 말고는 배워본 게 없어서.”


말하고 나니 내 잘못도 아닌데 조금 부끄러워졌다. 실제로 나는 어릴 적 학원을 다녀본 적 없다. 중학교 들어갈 무렵 잠시 들어간 보습학원, 내가 필요를 느껴 엄마를 졸라 겨우 들었던 영문법 단과 수업이 전부였다.

배우고 싶은 것은 참 많았다. 그림을 배우고 싶었다. 얇고 네모난 피아노 가방을 들고 다니며 친구들과 함께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바다에 놀러 간다면 몸이 둥둥 떠다닐 수 있도록 수영을 배우고 싶었고, 걸스카우트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걸스카우트의 갈색 단복은 정말이지 너무 예뻤다. 친구들이 한숨을 푹푹 쉬며 풀어대는 학습지도 왠지 재밌어 보였고, 그 얄팍한 학습지를 가방 앞주머니에 넣어 다니는 상상도 해봤다. 학예회 날 멋지게 플루트를 부는 다른 반 친구를 보며 플루트도 배우고 싶었다.


남편은 다시 물었다.

“어머니께 말해서 배우지 그랬어.”

“그게 말을 하긴 했는데 말이야….”


물론 엄마에게 말은 했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첫째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봤는데 별로 쓸모없는 것 같아서 안 된다고 하셨다.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둘째가 그림을 잘 그리니 언니에게 배우라고 하셨다.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내년 여름에 휴가 가면 강가에서 헤엄쳐보라고 하셨다.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쓸 데 없이 돈 들어간다고 안 된다고 하셨다. 학습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교과서로 공부하라고 하셨다.

 

하물며 특별활동까지도 돈 드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영화 감상반, 미술반, 운동 이런 것 하지 말고 돈 안 드는 것으로 해. 그래서 특별활동은 엄마의 지시대로 돈 안 드는 것, 문예반과 독서반에 들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몹시 매정한 엄마 같다. 매정함이 일부 사실이기도 했고 당시의 엄마는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바삐 일했고, 집에 돌아와 셋이나 되는 딸들의 요구와 말을 들어줄 틈도 힘도 없었을 것이다.


나에 비하면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운동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이 배웠다. 아마 엄마는 첫째와 둘째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치며 만족하기도 혹은 실망하기도 했을 것이고, 그것을 셋째에게 다시 가르칠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많았던 셋째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이렇다 할 악기나 운동을 배우지 못했다.


그게 억울했는지 취직한 이후로는 배우고 싶은 것을 닥치는 대로 배웠다. 에어로빅과 재즈댄스를 꽤 오래 했고, 소질이 전혀 없는 피아노를 배웠다. 요가에도 재미를 붙였다. 어학원을 다니며 외국어를 이것저것 배우고 문화센터를 다니며 퀼트나 수공예 종류를 이것저것 배웠다.


어릴 적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한 허기였을까. 성인이 되고 이것저것 배워 취미는 늘었지만, 아무것도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참 심심한 아이였다. 친구들이 학원으로 가면 그저 집에서 읽었던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했던 시절. 나는 늘 심심했고, 방치된 기분이었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눈꼬리가 조금씩 내려갔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배운 거야?”

“다행히 나에게 많은 게 딱 하나 있었어.”

“그게 뭔데?”

“샤프심.”


그때 내게 유일하게 여분이 많았던 게 있다면 샤프심이었다. 펜도 연필도 아닌 샤프심. 그것을 갈아 끼워가며 쓸 종이만 있으면 나는 뭐든 쓸 수 있었다. 돈 드는 것도 안 되고, 엄마 기준에 쓸 데 없는 것도 안 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것 중에 선택해야 했다.


샤프심은 단돈 200원이었고 한 통을 사면 실컷 써도 일주일쯤 버틸 수 있었다. 배울 수 있는 게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즐길 만한 것을 찾은 게 글쓰기였다. 검정 샤프 안에 진한 B 심을 톡톡, 끼워 넣는다. 그것으로 책을 읽으면 독후감을 쓰고, 매일 일기를 썼다. 좋아하는 가요의 노래 가사를 마음대로 고쳐 써보고, 두꺼운 공책에 유치한 소설도 썼다. 그나마 공책이 없거나 종이가 없으면 매일 아침 신문 사이에 껴들어오는 광고지 뒷면을 이용했다.


샤프와 샤프심만 있으면, 샤프심이 떨어지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취미이자 공부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배움 대신 차선으로 택한 글쓰기는 이제 내 밥벌이가 됐고, 나를 가장 편안하게 표현하는 수단이 됐다.


그러면서도 만약 자녀가 있다면 가장 가르치기 싫은 게 글자라는 것은 조금 아이러니하다. 어릴 때 집에서 혼자 글을 쓰던 나는 지금 생각해봐도 연민에 차오른다. 언니에게 물려받은 옷을 입고, 학교가 끝나면 집에 돌아와 혼자 밥을 차려먹고, 책을 보고 글을 쓰고, 나는 못 배워봤지만 언니들은 배워봤던 것들에 대한 동경을 품었다. 어쩐지 집에서 쓸모없는 자식인 것처럼 느껴져 글이라도 쓰며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서 내 자녀까지 글자를 좋아하고 글을 쓰게 된다면 왠지 가슴이 저밀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나를 따스하게 안아줬다. 나는 그나마 넉넉했던 샤프심과 책과 종이가 있었기에 그 시절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가끔 영화처럼 과거로 돌아가 해가 잘 드는 거실에 덩그러니 놓여 글을 쓰던 나를 본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으니, 시절이 만든 나는 여전히 어리고 허기진 사람이지 않나 싶다.


+ 어느덧 올해의 마지막 날이네요.

아쉽다는 듯 날씨도 매섭습니다.

제게 2019년은 희와 비가 쉴 새 없이 반복되는 나날이었습니다. 독자님들의 2019년은 어떠셨나요?

부디 가뿐한 마음으로 2020년 맞이하셨으면 합니다.


1월 7일에는 두 번째 책이 나옵니다. 프리랜서로 살며 경험하고 느낀 이야기를 전하게 될 거예요.

새로운 책으로 곧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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