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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23. 2020

손_(1)

나 실은 손잡는 것 싫어해.

‘아, 빼자고 하면 안 되겠지?’

이 단순한 문장을 12년이나 곱씹었다. 

‘꼭 손을 잡아야만 친구인 걸까?’

이 의문도 12년 내내 해결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여자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다니며 친분을 확인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초등학교에(나 때는 국민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앞뒤로 앉은 여자 아이들은 손을 잡고 다녔다. 그래 봐야 학교 건물 안에, 매일 오가는 하굣길이라 서로 잃어버릴 일도 없는데 그리 손을 잡고 다녔다. 


그러면서 가끔 체육시간이나 소풍 때 남자 짝꿍과 손을 잡으라고 선생님이 지시하면 너 나할 것 없이 울상이었다. 반면 여자 아이들끼리 손잡는 것은 커다란 통과의례를 거친 사람이 가질 법한 아주 위풍당당함을 자아냈다. 이름 붙이자면 손깍지 네트워크랄까?

나도 아무렇지 않게 그 위풍당당을 느꼈다면 좋았으련만, 무슨 속내가 이렇게 독불장군인지  손을 잡고 다니는 게 그리 싫었다. 구체적으로는 여자 아이들과 손을 잡아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손을 잡는 모든 상황이 싫었다. 손에 대한 무서운 기억이나 트라우마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고작 잡을 수 있는 손은 엄마나 외할머니 손 정도였다. 이미 그 시절 사람들과 피부가 닿는 게 묘하게 소름 끼치는 걸 깨달았다. 아마 어릴 적부터 아주 미약한 강박이나 결벽이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학교에 가니 나의 선호도는 연기처럼 홀연해졌고, 당연스레 또래들과 손을 잡고 다녀야 했다. 친구들의 따뜻한 손바닥과 내 손바닥이 마주하면 나는 우정보다 갑갑함을 느꼈다. 여름에는 축축하기까지 했다. 친구들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비틀어 빼고 싶었다. 친구들의 손은 감옥이었다. 손을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았고, 슬그머니 빼기라도 한다면 친구가 영영 마음 상해할 것 같았다. 


더 가관인 건 함께 손을 잡고 화장실에 가서 같은 칸에 들어가야 하는 일이었다. 절친한 친구들끼리 비좁은 칸에 꾸역꾸역 들어가서 한 명은 볼 일을 보고 한 명은 벽이나 문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눠야 했다. 가끔 셋도 들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 까무러칠 일을 어떻게 해온 건지 불가사의할 정도인데, 여하튼 그랬다. 


그렇게 우정을 확인하고 보여줘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고, 중학교에 가면 이제 좀 컸으니 손은 안 잡겠다 싶었는데 중학교에서도 아이들은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다녔다. 고등학교에 가면 서로 징그럽다고 안 하려니 싶었지만 여전했다. 하필 여중에 여고만 나왔으니 내리 12년을 내 손은 누군가에게 붙들려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그 감옥에서 출소했다. 


만약 그 시절 용기를 내서 친구들에게 ‘나 실은 손잡는 것 싫어해.’라고 말했으면 지금 내겐 어떤 기억이 남아있을까? 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러니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한들 나는 손을 제물처럼 친구들의 손아귀에 바쳐야만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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