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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18. 2020

기억나니, 휴거

그날까지 우린 모두 괜찮을 거야.

설 연휴에 덕담처럼 “마스크 챙겨라.”라는 말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이 사태가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어딜 가나 마스크 얘기가 한 번이라도 나오지 않는 자리가 없고, 확진자 수를 매일 체크하지 않을 수도 없다. 기분 탓일 수도 있지만 나는 지난 두 달 사이에 일감이 줄어들었다고 체감하고, 전해 듣기로는 ‘고통분담’이라는 이유로 급여가 삭감된 사람들도 있다. 전염병으로 인해 모두 침체되고, 불안하고, 황당하다.


그리고 특정 종교가 미친 영향력이 수시로 언급되는 상황에 이르자 나는 아주 오래전 겪어본 감각에 사로잡혀 새삼스레 소름이 끼쳤다.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삼십 년 가까이 거슬러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휴거’. ‘종말론’이라고도 불리는 휴거는 오래전 해프닝으로 끝났고, 내 친구와의 우정도 함께 끝났다.


초등학교 4학년쯤, 혹은 3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한 번씩 보는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휴거라는 단어가 언급되기 시작됐다. 휴거라는 단어의 뜻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검색해 보니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 신을 만난다.’는 뜻으로 종말론의 일부라고 한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었다. 가끔 둘째 언니가 교회에 나가긴 했어도 친구들과 놀러 한두 번 간 정도였고, 엄마가 절에 다니긴 했어도 신앙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나 역시 신에 대한 믿음이 애초부터 없었는데 주변 친구들의 전도가 부작용을 일으킨 케이스였다. 전도하는 친구들의 주장은 주로 이런 거였다.


친구 : 너 교회 다녀야 해. 안 그러면 지옥 가.

나 : 니 지옥 가봤냐?


친구 :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셔.

나 :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자꾸 전도를 할수록 지옥이든 신이든 눈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걸 믿으라는 친구들의 말에 거부감이 들었다.

그중에서도 나와 줄곧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하고 집이 가까워 서로의 청소를 기다려주는 단짝이었다. 친구는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고, 나는 긴 머리를 싹둑 잘라 친구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싶었다. 키가 비슷하고 서로 짝이 되길 원했기에 언제나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그랬던 어느 날, 친구가 쉬는 시간에 진지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이제 세상에 종말이 온대.”

“그게 뭔데?”

“이 세상이 끝난다고.”

“지구가 없어져?”

“지구만이 아니라 전부 다.”

“너도, 나도?”

“응. 전부 사라지는 거야. 휴거가 온대.”

“진짜? 그럼 나 죽는다고?”


친구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을 인정하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는 정해졌어. 그날 자정이 되면 세상이 끝나.”

태어난 지 고작 십 년쯤 됐는데 세상이 망할 거라고 친구가 속닥거리며 알려줬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친구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진실 같기도 했다.


“휴거라는 거 오면 어떻게 해야 돼?”

“세상이 끝나니까 전부 정리를 해야지. 그날이 오면 너도 나도, 학교도, 집도 다 사라지니까. 그리고 교회에 나와야 해.”

친구는 내내 진지하게 말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여서인지 집에 가는 길에도 내내 휴거 얘기를 했다.

그날 저녁식사 시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서는 휴거가 이슈였다. 휴거를 믿는 사람들이 전 재산을 정리해 종교단체에 헌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낮에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있어 엄마에게 살짝 물어봤다.

“엄마, 휴거 진짜 와요?”

엄마는 지나가던 개미 한 마리도 못 날릴 만큼 아주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으레 하던 단골 멘트로 답하셨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밥 깨끗이 먹어라.”


그날 밤 나는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친구 말대로 세상이 정말 끝난다면 지금 이렇게 편안히 자는 게 무슨 의미일까? 세상을 정리한다고 해도 가진 것도 없는 초등학교 4학년이 정리할 게 뭐가 있을까? 혹시 친구가 허황된 생각에 빠져 거짓말을 하는 거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새벽까지 뒤척였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학교를 가니 친구는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그럼 이제 나랑 교회 나갈 거지? 엄마한테는 말했어?”

나는 아침까지 고민한 방법으로 친구에게 답을 했다.

“정말 세상 끝나? 그날 되면 정말 너랑 나랑 다 죽어?”

“응, 그렇다니까!”

“그럼 니 필통 나 줘.”

“뭐라고?”


필통을 내놓으라는 내 말에 친구의 얼굴은 살쾡이처럼 사나워졌다.

“내 필통을 네가 왜 달라는 거야?”

어차피 세상 끝나는데 니 필통이 무슨 소용 있어. 그럴 거면 그냥 나 줘. 안에 들어있는 펜이랑 색연필 다 합쳐서.”

“싫은데?”

“너 말대로 세상없어진다면서 필통은 끝까지 갖고 있겠다는 거야?”


이쯤 되니 진지하게 말하던 친구가 빽!하고 소릴 질렀다.

“내 필통이 너랑 뭔 상관이야!”

“네가 그랬잖아. 너랑 나랑 우리 반 애들 다 죽는다며. 그럼 죽기 전까지 니 필통 내가 쓴다는 건데 싫냐? 필통이랑 다이어리, 그것도 나 줘. 그럼 나 진짜 네 말 믿을게.


친구의 단발머리가 가발처럼 들썩거렸다. 일 년 가까이 친하게 지낸 친구였지만 그렇게 화가 난 얼굴은 처음 봤다. 그러다 수업이 시작되고, 필요한 말을 조금씩 나누며 친구의 분노는 누그러졌지만 우리 사이에 휴거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의 그 날이 왔다. 그날은 온 나라 사람들이 알고 싶지 않아도 곳곳에서 휴거로 들썩이는 통에 모를 수가 없었다. 휴거를 믿는 사람들은 그 날을 앞두고 울면서 기도에 심취했고, 어처구니없게도 그날 학교엔 결석한 아이들이 꽤 많았다. 의외로 친구는 학교에 나왔다. 그리고 내게 경고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잊지 마. 오늘이야. 오늘 자정에 모든 게 끝나.”


나 같으면 세상 마지막 날이면 학교 땡땡이치고 잔돈 10원까지 탈탈 털어 미친 듯이 뽑기를 하든 떡꼬치를 사먹고 있어도 모자랄 텐데, 얘는 굳이 학교까지 나와서 휴거를 강요할 게 뭔가 싶었다. 그러면서도 휴거가 진짜면 어쩌나 싶은 불안감이 말끔히 사라지진 않았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세상의 종말 따위는 없었다. 모두에게 보통의 날짜와 요일일 뿐이었다. 그 전날에 비해 다음날 나는 키가 1밀리쯤 컸을 수도 있고, 어제와 하루쯤 다른 내가 돼 있었다. 어른들은 평소처럼 일터에 나갔고, 나와 자매들은 학교에 갈 준비를 했고, 마당에 강아지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꼬리를 흔들었다. 그렇게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뜬 아침 웃음만 피식피식 나왔다.


학교에 도착해보니 친구는 먼저 와 있었다. “야, 세상 끝난다며?”하고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자리에 앉아 가방을 풀었다. 하지만 어제와 하루쯤 다른 내가 되었듯 옆자리에 친구 역시 어제와는 조금 다른 친구였다.

늘 다정하게 먼저 말을 걸던 친구는 사라지고,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내게 등을 돌린 친구의 뒤편에 차가움이 흘렀다. 친구는 고작 4학년밖에 안 된 아이면서 말 한마디 없이 그토록 단호하게 나와 세상을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다 끝나버린다는 말을 믿어버린 친구는 여느 때와 같이 날이 밝고 햇살이 방안에 가득 차오르는 개운한 순간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으리라.


게다가 필통을 달라고 할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날은 씩씩대다가도 서로 말을 섞었지만, 이날은 등 돌린 친구가 내 얼굴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고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휴거가 일어나지 않은 게 마치 내가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처럼 굴었다. 그 모습에 나도 짜증이 난 나머지 점심시간부터 다른 친구들과 밥을 먹었고, 집도 따로 가고, 다음 달에는 짝도 바꿔버렸다. 친구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사귀었다. 한 시절의 해프닝이었던 휴거는 1년의 절친했던 친구사이를 영영 떼어놓았다.

최근 코로나 사태로 화제가 된 특정 종교의 포교방식, 행동방식 등이 인터넷상에서 공유되며 내내 회자되고 있다. 특정 종교의 맹목적인 전도, 정부의 지침을 어기고도 고수하는 행동방식은 휴거가 온다며 온통 혼란스러웠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오지도 않는 세상의 종말 덕에 다정했던 친구는 등을 보였다.


나는 2020년을 살며 그 시절을 회상한다. 이제 소식을 알 길 없는 그 친구는 1992년의 휴거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맹목적인 믿음이 사람을 얼마나 극으로 몰고 가는지, 그 결과 곁의 사람을 떠나보내게 되는 아픈 경험을 너무 어린 나이에 한 건 아니었을까? 또 그런 해프닝으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경험이 있어 우리가 조금쯤은 성장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 있을까?


세상의 종말은 결국 사람의 종말. 각자의 물리적 생이 다할 때가 진정한 끝이다. 정해진 날짜에 세상이 망해버리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끝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진실은 변함없을 터다. 비록 등 돌린 친구였지만 살아갈 마지막 날이 비로소 세상의 끝이라는 사실을, 그날까지 우린 모두 괜찮을 거라는 확신을 전할 길 없는 친구에게 한 번쯤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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