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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02. 2020

국밥 먹는 개

아심이는 내겐 그저 사랑이었는데.

얼마 전 반려견 모카의 사료를 바꿨다. 처음 구입한 어린 강아지용 사료는 기름 냄새 같은 게 났는데, 이번에 바꾼 사료는 냄새가 심하지 않았고 모카도 잘 먹는 것 같다. 모카 저녁을 주고, 나와 남편도 저녁을 먹으면서 요즘 주 관심사인 반려견 키우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남편은 어릴 적부터 아파트 생활을 해서인지 주로 소형견을 키웠고 사료를 먹였단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까지 주택에 살았는데, 네 살 때부터 13년간 살았던 동네는 우리 집을 비롯해 동네 전체가 단독주택으로 이루어져 모두 작든 크든 마당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릴 적부터 11년간 키운 개는 당연스레 마당에서 살았다. 이모가 데려다준 개 이름은 ‘아심이’였다. 몸은 새카만 털이었고 손과 발, 눈썹 부분만 아이보리색 털이 선명하니 예뻤다. 성견이 됐을 때도 몸 크기가 별로 크지 않았던 기억이다. 몸이 조금 포동 했던 아심이는 걸을 때마다 엉덩이가 들썩거리는 타입이었고, 그리 길지 않은 다리로 옥상에 올라 학교에서 돌아오는 내가 보이면 얼른 내려와 대문 앞에 앉아 꼬리를 흔드는 영리한 개였다. 


아심이는 내가 어릴 때부터 우리 집 마당에서 자랐고 개는 원래 마당에서 사는 줄 알았다. 동네의 다른 집에서 키우는 개들도 모두 마당에서 살았다. 우리 집 마당에는 아빠가 나무판자로 만든 아심이 집이 있었는데 추운 계절에는 광이라고 부르던 실내 창고에서 지냈다. 


목줄이 있긴 했는데 평소엔 쓰지 않고 집에 손님이 오면 예의상 목줄을 메어놓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위험한 일이지만, 당시 아심이의 삶은 자유 그 자체였다. 목줄을 매지 않으니 마당에서 실컷 뛰어놀고 내키면 화단에 흙도 파헤치고, 엄마가 혼내면 성의껏 쥐도 한 마리씩 잡았다. 나름 ‘집 지키기’라는 담당업무가 있었기에 문 밖에 낯선 사람이 보이면 우렁차게 짖었다. 


일상이 워낙 자유로워서 가족들이 오가며 대문이 열리면 그 틈에 후딱 밖으로 나가 한참 놀다 배고프면 돌아오곤 했다. 이 역시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른다. 개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가 우리 집에서야 괜찮지만 밖에서는 어떤 위협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밖에서 한참 놀다 돌아온 아심이는 크게 짖어 귀가를 알렸다. 

아심이 사진이 없어 아쉬운대로 모카 사진을 올려 봅니다:)

이런 아심이 이야기를 전하는데 남편이 질문했다. 

“그럼 아심이도 사료 먹었어?”

“아니, 사료 안 먹었는데. 그 시절엔 개밥에 돈 쓰는 걸 생각하지 못한 사람이 많았어.”

“그래? 나는 주변에 개 키우는 사람들 다 사료 먹였는데.”


실내견과 마당견의 차이인지, 아니면 내가 원시적인 과거를 보유한 건지 ‘사료’라는 말에 나는 조금 긴장했다. 사실 이쯤에선 남편이 더 묻지 않길 바라기도 했다. 

“그럼 아심이한테 뭐 먹였어?”

“국밥.”

남편이 완전 기겁한다. 

“뭐? 개한테 뭘 먹여?”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왠지 잘못한 사람처럼 기가 죽어 대답했다. 

“아니 그게, 나 때는 개한테 사람 먹던 밥 먹이고 그랬어. 그냥 우리 먹던 밥이랑 국이나 찌개랑 반찬 놔주고 그랬어.”

“그거 개 건강에 안 좋지 않아?”

“그땐 그런 지식이 많지 않았나 봐. 다들 그렇게 키워서 난 개들이 다 우리랑 똑같은 거 먹는 줄 알았지.”


사실이 그랬다. 11년 동안 우리 가족과 아심이는 식사 메뉴가 같았다. 전기밥솥에 지은 밥을 우리가 먹듯, 아심이 밥그릇에 담는다. 그날 우리 가족이 먹은 국이나 찌개를 그 위에 몇 국자 담는다. 찌개가 짜다 싶으면 따뜻한 보리차를 조금 섞었던 것 같다. 그 위에 그날 우리 가족이 먹었던 두부 부침이나 고기볶음 따위를 얹고, 생선을 먹었다면 생선살을 발라 얹었다. 아심이가 생선뼈가 목에 걸려 켁켁댄 적이 있어서 그 이후로는 살을 발라 먹였다. 그렇게 아심이 전용 ‘국밥’을 아침저녁으로 든든히 먹였고, 같은 크기의 그릇에는 매일 새로운 물을 담았다. 


아심이는 자유로운 견생을 사느라 우리가 모르는 사이 몇 번 임신을 하고 새끼를 낳았다. 새끼를 낳았을 때도 국밥을 먹었는데, 이때는 소고기 미역국이었다. 아심이가 새끼를 낳으면 엄마는 커다란 솥에 소고기를 듬뿍 넣고 미역국을 끓였다. 그러니까 아심이가 새끼를 낳으면 우리 가족이 미역국을 얻어먹는 셈이었다. 


너무 뜨겁게 주면 데니까 적당히 식혀서 온기가 남아있을 정도의 소고기 미역국밥을 먹고 아심이는 새끼를 품었다. 그리고 새끼들이 얼추 자라고 우리 집에서 모두 키울 수 없게 되면 동네 사람들이나 친구네 집에서 한 마리씩 데려갔다. 이런저런 이유로 동네의 웬만한 집 마당마다 개가 한 마리쯤은 있었다. 

눈 많이 온 날 나랑 뛰어놀았던 모카

다시 남편이 물었다. 

“그럼 친구네나 동네 사람들한테 간 개들은 사료 먹었어?”

나는 다시 민망해진 상태로 답했다. 

“아니, 걔들도 국밥 먹은 거 같은데.”

그놈의 국밥. 나를 무지랭이로 만드는 국밥.


“왜 너희 동네 사람들은 자꾸 개한테 국밥을 먹인 거야?”

“그, 예전엔 다 그렇게 키운 것 같은데. 나 개가 사료 먹고 자란다는 거 20대 중반에 처음 알았단 말이야.”

이 말까지 하고 나니 도무지 부끄럽고 나 자신이 무지하게 느껴져서 얼굴이 벌게졌다. 


그 시절 개를 키우던 방식과 요즘 개를 키우는 방식은 차이가 현저히 나서 비교할 구석이 없다. 지금 우리 집 모카는 알레르기를 예방하는 사료를 먹고 첨가제 없이 만든 간식과 껌을 먹는다. 눈 세정제와 귀 세정제, 치약과 구강청정제를 쓰고 목욕 후에는 향수도 뿌린다. 장난감과 방석, 모든 용품은 이틀 걸러 세탁하니 지저분함과 거리가 한없이 먼 생활을 유지한다. 내가 손수 발톱도 깎아주고, 난코스인 항문낭 짜기도 한다. 


이렇게 소중히 키우는 모카가 있고, 나름의 방식으로 소중히 키운 아심이도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그 시절 우리가 아심이에게 먹인 국밥은 동물학대일 수도 있다. 몸집이 작은 개에게 사람과 똑같이 나트륨 섞인 밥을 먹였으니 신장에 좋지 않았을 거다. 내 기억에 아심이는 11살까지 살았다.

그래도 당시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먹는 것만큼은 사람과 차별 없이 먹이자는 나름의 배려였다. 아이를 낳으면 사람처럼 미역국을 먹이고, 때가 되면 목욕과 빗질을 해줬다. 한 여름이면 마당 수돗가에서 아심이와 물놀이를 했다. 아심이는 발톱 한 번 안 잘라주고 항문낭 한 번 짜준 적 없지만 스스로 몸을 깔끔하게 유지했다. 이제 보면 위험한 행동이긴 했지만 아심이가 답답할 까 봐 목줄을 매지 않고 마당에 자유롭게 풀어 길렀던 것도, 동네에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개가 한 둘이 아니었건만 사고 한 번 없이 무난하게 살았던 것도 개나 사람이나 그저 한 집 사는 가족이란 생각이 너무나 당연했기 때문 아닐까?


언젠가 모카의 예방접종을 위해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설명했다. 

“초콜릿, 포도, 양파와 마늘 절대 먹이시면 안 됩니다. 죽을 수도 있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릴 적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 다 먹고 싶었지만 아껴놨던 초콜릿을 꺼내 아심이와 나눠먹었다. 밖에서 떡꼬치를 사 먹고 절반쯤은 꾹 참고 남겨서 마당에서 반기는 아심이에게 양보했다. 우유급식으로 받은 우유를 학교에서 안 먹고 책가방에 넣어 와서는 컵에 반 따르고, 남은 반은 아심이 밥그릇에 부어주고 함께 앉아 우유 마시는 시간을 즐겼다. 아심이는 나를 잘 따르는 동생이니까 나눠먹는 게 당연했다. 


그 모든 게 아심이의 건강을 해치기만 했을까? 마당 평상에 나란히 앉아 함께 간식을 나눠먹던 추억이 어찌 아심이에게 해롭기만 했을까? 반려견 키우기에 제약이 너무 많은 지금 모카를 키우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나와 동등한 것을 먹여 키웠던 아심이는 내겐 그저 사랑이었는데. 



+ 4월 2일은 모카의 첫 생일이랍니다. 

직접 반려견용 케이크도 만들고 간단히 생일상을 차려줬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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