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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10. 2020

집게다리는 이제 안 먹을래요.

가난과 절약의 습성은 흰 옷에 배어 버린 풀물과 같다.

얼마 전 생일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생일을 주변에 말하는 게 조금은 부끄러워진 요즘이다. 예전 글에도 썼지만 떠들썩하게 파티를 하던 20대는 훌쩍 지났고, 축하한다는 메시지도 뜸해지는 요즘이라 여느 생일과 마찬가지로 남편과 조용히 보냈다.


이번 생일에는 여수로 짤막한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행만큼은 내 식성에 다 맞추겠다는 남편의 선언에 메뉴 선정이 정말 편했다. 몇 해 전 여수 여행에서는 해산물이 풍부한 남쪽 지방에 갔으면서도 생선이 싫다는 남편 때문에 미스*피자에서 식사를 했다.


남편은 그 여행이 두고두고 미안했는지 이번에는 메뉴 선정 기회를 넘겼다. 그래서 내 뜻대로 점심에는 평소 집에서 잘 해먹지 않는 생선구이를 먹으러 갔다. 아무리 환풍기를 틀고 에어 프라이어를 써도 집안에서의 생선 냄새는 그저 생선 냄새일 뿐이니까.

저녁에는 게장정식을 먹으러 갔다. 몇 해 전이었으면 남편이 펄쩍 뛸 메뉴지만 나와 6년쯤 살아서인지 이제 한식도 해산물도 곧잘 먹는다. 회와 게장정식 중에 고민하다가 오랜만에 신선하게 담근 게장을 먹자며 식당을 찾았다.


정식 두 개를 주문하고 앉아있으니 곧 여러 가지 밑반찬들이 나왔다. 친절한 얼굴의 아주머니가 꼬막 까는 법도 직접 시범을 보여주셨다. 갖가지 젓갈과 보쌈이 나오고 오랜만에 먹는 고등어조림과 꼬막무침도 푸짐했다. 이윽고 양념게장과 간장게장이 소복하니 나왔다.


그런데 게장을 보는 순간 뚜껑처럼 열리는 기억들이 있었다. 게의 부드러운 몸통에서 나오는 살과 여린 다리에서 나오는 살들, 딱딱한 집게다리를 어렵사리 깨물며 뽑아먹던 게살의 맛. 특히 집게다리는 지독한 미감이었다.


아주 어릴 적, 먹고사는 게 매우 힘든 시절이 있었다. 나의 영유아기를 관통하던 시절, 부모님은 먹을 게 없어 인천 앞바다에서 조개를 캐다가 젓갈을 담가 반찬을 해 먹었다고 한다. 외할머니가 번번이 쌀을 대줘서 그나마 가능했다.

그 시절 많이 먹었던 것 중에 꽃게 집게다리가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동네에 살아서 해산물 구하기야 쉬웠다. 할머니가 일하는 어시장에서도 그랬고 어느 시장에 가든 집게다리 구하기는 쉬웠다. 꽃게를 잡다가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것, 살아있는 꽃게들끼리 싸우다 잘려나간 집게다리들만 모아 파는 거였다. 주로 식당에서 육수용으로 사는데 당시 엄마는 그런 집게다리 한 소쿠리를 천 원 정도에 사 왔던 것 같다.


그것을 박박 씻어서 절반쯤은 간장에 담가 장을 담그고, 남은 것을 또 나눠 냄비에 넣고 물을 붓는다. 그렇게 팔팔 끓이면 꽃게탕처럼 얼큰한 맛이 나는데 거기에 파나 양파 등을 넣고 국처럼 마시거나, 직접 반죽한 수제비 따위를 넣고 끓여먹었다.


탕으로 먹는 날은 그나마 괜찮은데, 집게다리로 담근 장은 어린 내가 먹기엔 혹독한 반찬이었다. 날카로운 집게다리는 입 주변을 내내 아리게 만들었다. 요령껏 가위로 자르면 살을 발라낼 수야 있었겠지만 다섯 식구 둘러앉아 일일이 가위로 다듬어 먹기는 힘들었다. 그저 밥 한술 먹고 집게다리 쪽쪽 빨아가며 김치와 먹던 조금 속 쓰린 식단이었다. 그 과정이 싫어서 반찬투정도 부려보고, 밥을 안 먹겠다며 심술도 부려봤지만 엄마로부터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남기지 말고 깨끗이 먹어라.”


몇 해 지나 단칸방 집을 벗어나며 그 식단에서도 조금은 빗겨 났지만 우리 가족의 단출한 밥상이며 절약하는 습성은 집을 옮겨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씩 상상하곤 했다.

‘부잣집 애들은 집게다리 안 먹겠지?’

‘나중에 어른 되면 엄마 말 안 듣고 꽃게 몸통만 먹어야지.’


그랬으면서 정작 친정의 살림이 조금씩 피어나고 어른이 된 후에는 엄마가 아무리 질 좋은 꽃게를 사다가 장을 담가도 귀찮다는 이유로 몇 번 먹지도 않았다. 이따금씩 집게다리를 마주치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입 주변이 아려왔기 때문일까?

그리고 여행지에서 게장정식을 먹으며 나는 다시 그 집게다리를 만났다. 평소 게장을 잘 먹지 않던 남편은 내게 집게 다리도 먹는 거냐고 물었다. 나는 잠깐 뜸을 들이다 의식적으로 말했다.

“다리 먹어도 되는데, 먹지 마.”

“왜?”

“집게다리에 입 찔리면 아리니까. 연하고 가느다란 다리는 그냥 깨물어먹어도 되는데 집게다리는 먹지 마.”


집게다리는 먹지 말라고, 어쩌면 나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남편에게 대신했다. 이제 억지로 집게다리를 먹어야 할 시절은 지나왔으니 나든 가족이든 집게다리 파먹는 데 공을 들이고 싶진 않았다. 그럼에도 의식적으로 남겨버리는 집게다리를 보며 ‘내가 낭비하는 건 아닌가.’, ‘음식 이렇게 남기는 게 좋은 행동은 아닐 텐데.’하고는 어설픈 반성을 하고 만다.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다가도 익숙한 무의식에 후순위로 밀려버리는 욕구가 있다. 어릴 적 어른이 되면 집게다리는 안 먹겠다고 꼭꼭 품었던 마음도 오랫동안 근검과 절약을 맹신한 환경에 있던 탓에 흐지부지된다. 가난과 절약의 습성은 흰 옷에 배어 버린 풀물과 같다. 그래서 나는 집게다리 하나 거부하는 데도 의식적인 마음이 필요하다.


밥알 남기면 혼나던 유년기, 사골국물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던 부모님, 반찬투정이 최고의 불효인 듯 여겨지던 빠듯한 시절을 모두 마쳤음에도 꽃게의 집게다리 하나에 마음을 쓰고 생각이 골몰해진다. 누가 그랬던가. 살면서 남긴 밥, 죽고 나면 다 먹어 치워야 한다고. 그런 억지스러운 농담도 씁쓸하게 상기하게 되는 생일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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