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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19. 2020

도망자의 집

그 집에서 목격자는 오로지 앙고라 털 같은 햇살뿐이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다. 십 년도 훌쩍 넘은 그 일의 편린은 지금까지도 똑똑히 찍어놓은 사진처럼 남아있다.

우리 가족은 당시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있었다. 살던 집에 불편함이 늘면서 보다 반듯하고 넓은 집이 필요했다. 그리고 외가와 가까운 곳으로 집을 옮겨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고 싶었던 엄마의 바람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저녁이나 주말이면 틈틈이 집을 보러 다녔다. 그 집들 중에는 너무나 탐이 나지만 가격에 흠칫해 발만 살짝 들여놨다 나온 집이 허다했고, 너무 지저분해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집도 숱하게 봤다.


그중 어느 집을 보러 갈 때였다. 부동산에서는 이 집이 비어있으니 아무 때나 방문해도 된다고 했다.

“공실인가요?”

“공실은 아니고요. 살림은 아직 그대로 있어요. 신혼부부가 아기 낳고 살던 집인데 지금 부인 쪽이 아이 데리고 친정에 가있다던가? 대강 그렇다네요. 남편도 일 때문에 다른 데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 무렵 집을 보러 다니면서 나만의 안목이랄까 혹은 직감 섞인 편견이랄까, 그런 느낌을 키운 게 있다. 그건 화목한 가정, 적어도 큰 사달이 나지 않을 정도의 가족이 살았던 집이 관리가 잘 돼있고 살만한 집이라는 거였다.

집을 보러 가면 실제 거주자가 어떤 모습을 연출하더라도 은연중에 눈에 보이는 부분이 있다. 집을 보러 갔을 때 부부 중 누군가는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는데 다른 누군가는 거실에 누워 텔레비전을 보고 있거나, 아기가 울고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를 하거나, 문을 열어주는 이의 얼굴에 웃음기 한 줄 없이 나를 훑어보거나, 가족 중 일부가 문을 걸어 잠그고 방을 안 보여주는 등의 집은 화목함과 거리가 멀어 보였고 그런 집은 반드시 어딘가에 하자가 있었다. 관리라고는 전혀 되지 않은 집에 엷게 박혀있는 불행의 냄새. 집을 많이 보러 다닐수록 나는 그 냄새가 느껴졌고, 하자가 보였다.


이런 까닭에 부부가 따로 살고 있다는 그 집의 내역을 들었을 때 썩 내키진 않았다. 그럼에도 발길을 끊을 수 없었던 건 그 평수에 그 가격은 도무지 내칠 수 없는 장점이었기 때문이다. 준공연도도 얼마 되지 않은 신축건물이었다. 우리 가족은 별다른 고민 없이 그 집에 방문했다.


봄 햇살이 앙고라 털처럼 보드라운 오후였다. 주상복합건물에 위치한 그 집은 1층에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경비실과 널찍한 지하주차장에서 점수를 얻었다. 상가 층에는 괜찮게 보이는 빵집과 카페, 병원, 약국이 있었다. 함께 방문한 중개사가 이런저런 장점을 나열하는데 모두 마음에 들었다.


우리가 보려던 집은 대강 10층쯤이었던 것 같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갔다. 집을 비우고 각자 어딘가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신혼부부는 뭐가 그리 급했는지 현관에 거의 벗어던지다시피 한 신발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그 신발을 밟지 않도록 조심하며 중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섰다.


바깥과 마찬가지로 앙고라 털처럼 보드라운 햇살이 거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정남향의 집은 자신의 내부를 소독이라도 하듯 햇살을 가득 껴안고 있었다. 집은 생각보다 꽤 널찍했고 방과 욕실도 넉넉했다.


그리고 나는 그 널찍한 거실 한복판에 급히 떨구고 간 마냥 어색하게 떨어져 있는 포대기를 발견했다. 쓰던 포대기가 아니라 치우기 위해 둘둘 말아 앙칼지게 매듭을 지은 하늘색 포대기였다. 그 주위에는 얇은 아기 이불, 몇 가지 물품과 리모컨이 방금까지 쓴 것처럼 어지러이 놓여있었고 그 모든 물건이 포근한 햇빛을 온몸으로 맞이하고 있었다.


집은 둘러보면 볼수록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모든 방과 욕실이 정돈되지 않고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침실에는 방금까지 자던 사람이 떨치고 나간 것처럼 이불이 젖혀있었고, 서재로 보이는 방의 책상에는 입을 벌린 가방이 놓여있었다. 드레스룸으로 사용하는 방의 옷장 문은 심지어 두 개쯤 열려있어 내부의 옷가지나 물품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가장 이상한 건 주방이었다. ㄱ자로 만들어진 주방 조리대 쪽에는 타다 만 분유가 있었다. 젖병의 뚜껑이 열린 채 놓여있고 옆에는 대충 덮은 분유통과 스푼이 널려있었다. 그 주변에도 컵이며 주방용품이 있었고, 씽크볼 안에도 컵과 스푼 따위가 들어있었다. 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담가 놓은 지 시간이 좀 흐른 것 같았다.


중개사는 이 가격에 이만한 집이 없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내가 봐도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좋은 가격이었다. 하지만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집안 분위기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저, 사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 댁에 사시던 분들이 왜 갑자기 집을 내놓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중개사도 자세히는 모르는 눈치였다.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고 이 집 남편분이 집을 내놓는다고 한 번 찾아온 이후에 본 적이 없어요. 집은 너무 좋은데 급한 일이 생긴 건지 시세보다 많이 싸게 내놨죠. 경매에 오른 집도 아니고 빚도 없고 아주 깨끗한 집인데 말이에요.”


그 무렵 보던 집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상의를 시작했다. 탐탁지 않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급하게 내놓은 이 매물에는 석연치 않은 분위기가 가득했다.


상식적으로 갓난아기를 데리고 어딘가로 이동하는 엄마가 분유를 타다 말고 나가버리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단 며칠이라도 다른 곳에서 지내야 한다면 설거지를 마치고 주방정리를 하고 아기에게 필요한 짐을 싸서 이동했을 것이다. 침대며, 옷장이며, 욕실이며 모든 곳에서 방금까지 살던 사람들이 몸만 쏙 빠져나온 것 같은 그 집에서 목격자는 오로지 앙고라 털 같은 햇살뿐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그 집을 사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꿈을 꿨다. 낮에 보고 온 그 집이었다. 내 시야는 바닥에 누운 듯 낮았다. 보이는 앞쪽에서 몸이 조금 불어난 여성이 집에서 입던 차림새로 품에 아기를 안고 맨발에 신발을 꿰어 신고 달려 나갔다. 급히 나가면서 손에 물건 몇 개를 겨우 들고나가는 여성은 포대기를 떨어뜨렸다. 그 하늘색 포대기는 그렇게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았다. 그리고 고요했다.


잠에서 깬 아침, 커튼을 열어 내 방에 햇살을 들였다. 서향이었던 내 방으로 들어오는 햇살은 그 집의 정남향 창에서 들어오는 보드라운 햇살과 온도가 조금 달랐다. 그럼에도 나는 다소 안도했다.


어쩌면 그 집에서는 꿈에서 봤던 것처럼 긴급한 도망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타던 분유에 물을 붓기도 전에, 포대기를 쥐고 나갈 틈이 없었던 순간, 이불을 박차고 맨발로 뛰쳐나갔던 그 긴박한 순간을 상상하며 우리 가족은 그 집을 향한 호감을 고이 접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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