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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04. 2020

손_(4)

숨길 수 없는 인생 영수증

손이 늙는다. 언젠가는 내 몸에서 제일 자신 있는 곳이 손인 적도 있었다. 결혼한 지 일 년쯤 지나서였나. 가족모임에서 내 손을 보고 언니들이 놀린 적 있었다.

“네가 살림을 하긴 하는구나. 얘 손마디 두꺼워진 것 봐.”

“놀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주부 다 됐네?”


매일 보는 내 손이 언제 두꺼워졌는지 알 턱이 있나. 그런데 그 놀림이 내내 마음에 남았다. 살림이 무조건 고생은 아니지만, 그 피로한 활동이 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게 속상했다. 가사뿐만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손을 움직여야 한다면 마디가 굵어지고 주름이 깊어지고 색도 탁하게 변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독한 고생을 한 뒤에 사람들 앞에서 숨기고 싶다 한들 손만 보면 전부 드러나는 걸까? 그렇다면 그저 손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벌거벗은 존재가 되는 건 아닐까?

그날부터 나는 연말이나 연초, 시간의 흐름이 유독 강렬한 계절이 오면 손을 유심히 살펴본다. 그럴 땐 늙어버린 내 손을 인정하게 된다. 손마디의 주름이 굵어지고 피부 결마다 촘촘히 주름진 손. 나이를 먹어 가는데 손이라고 늙지 않을 재간이 어디 있을까.


지난 연말에는 손톱에 필요한 영양분이 빠져나갔는지 손톱들이 앙상하게 깨져있어서 마음이 더 복잡했다. 갈수록 늙어가는 손은 내가 살아온 한 해를 여실히 보여주는 영수증과 같았다.


손가락을 둘러싼 피부에 굵은 고랑이 파였다. 우리 나이로 올해 서른여덟. 살면서 고되고 피로했던 시간과 또 즐거웠던 시간이 함께 그 고랑에 담겨있다. 손을 뒤집어도 고랑에 담긴 시간은 쏟아지지 않는다. 고랑은 얕아지지 않는다. 손을 씻고 핸드크림을 바르면 잠시 옛 모습을 되찾았다가 금세 본래의 고랑이 팬다. 숨길 수 없는 인생 영수증이 바로 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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