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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31. 2020

손_(3)

글 쓰는 사람답게.

마지막 다녔던 신문사에 여자 기자는 나뿐이었다. 분야가 분야다 보니 짐작은 했다만 ‘남초 회사’에 다니는 건 결코 녹록지 않았다. 그 무렵 나는 손톱을 조금씩 길러 매니큐어를 꼬박꼬박 바르고 다녔던 20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국장님 눈에 내 손이 띈 모양이었다. 불호령이 떨어졌다.  

“타이핑 치고 일하는 기자가 무슨 손톱을 길러! 글 쓰는 애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있냐?”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국장님은 서랍을 덜덜 뒤지더니 손톱깎이를 가져왔다.

“당장 잘라!”


속으로 ‘이런 폭력이야!’라고 소리 지르며 억울하지만 손톱을 잘랐다. 하지만 국장님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닌 게 잔뜩 기른 손톱이 키보드를 칠 때마다 키보드 사이사이에 끼는 순간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걸리적거리지만 손톱을 짧게 자르면 손이 짜리 몽땅해 보일까 봐 애써 길러온 거였다. 게다가 이깟 손톱 때문에 존경하는 분의 비위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거짓말같이 손톱을 자른 이후 키보드를 치는 게 몹시 가볍고 편안했다. 손톱을 자르면 편해질 것을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버텨왔던 차에 국장님 지시를 듣고 겸사겸사 자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신문사를 퇴사하고 직업을 바꿔 커피 프랜차이즈에 입사했다. 너무나 좋아했던 기자생활이지만 넘을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다른 직업군으로 이직을 하면서 나는 그리 손톱 치장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오기를 부리듯 다시 손톱을 기르고, 키보드에 끼여 가면서도 그럭저럭 참으며 지냈다.


그런데 나는 몇 해 전 다시 짧은 손톱으로 돌아왔다. 다시 프리랜서 작가로 일하기로 마음먹은 날이었다. 좋아하는 청록색 매니큐어가 발라진 손톱을 깔끔히 닦아내고 손톱깎이로 또각또각 잘라냈다.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왔으니까, 글 쓰는 사람답게.’


손톱을 자르며 국장님의 불호령에 당황했던 순간이 여전히 유산으로 남아있다는 데 움찔했다. 남자 선배들과 후배들 사이에서 혹여나 소외당할까 한 번씩 불러 상담해주시고, 좋은 기사는 모두 보는 앞에서 크게 칭찬해주시고, 냉철한 평가도 빼놓지 않던 분이셨다. 그랬던 국장님이 반드시 자르라고 했던 손톱, 그깟 손톱이 무슨 의미였을지 글 쓰는 사람으로 귀향하고 나서야 깊이 느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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