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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un 16. 2020

할 말이 없으니까요

함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거는 다정한 사람들

우리나라에서 북쪽에 위치한 파주에 산 지 어느덧 4년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이사와 이 작은 반도에서 나름 북쪽이라 겨울에 춥고 여름은 덜 덥게 산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기온차가 나는데 미국이나 중국처럼 큰 땅덩어리에선 도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게 될까?


그리고 어디서든 파주에 산다고 말하면 어김없이 이런 대답을 듣는다.

“파주면 헤이리?”

아니라고, 헤이리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파주는 헤이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나 처음 보는 업무적 관계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는 곳이 파주라고 대답하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헤이리냐고 묻는다. 혹은 이런 버전도 있다.

“파주면 헤이리 자주 가겠네?”

아니라고, 자주 안 간다고.


헤이리 마을은 집에서 차로 20분쯤 가야 할 정도로 거리가 있고 기껏해야 일 년에 두어 번 가는 게 고작이다. 헤이리에 식당이나 카페가 괜찮긴 한데 닳도록 방문할 정도로 애정이 있진 않아서 날 좋은 봄가을에 한 번씩 갈 뿐이다.

여기가 헤이리입니다... 자주 안 갑니다..

그래도 헤이리를 묻는 그 흔한 질문이 딱히 싫을 이유도 없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랜드마크를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얼마 전 미팅 자리에서 나눴다. 그날 만난 대표님과 ‘오지랖’에 관해 이야기할 때였다.

사람들이 할 말 없으니까 그런 거 물어보잖아요. 결혼은 왜 안 했냐, 애는 언제 낳을 거냐 등등. 그게 나쁜 마음은 없는데 서로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러는 거잖아요.”

“그렇죠. 어색하지만 싫지 않은 사이에서 할 말이 없을 때 나오는 말들이죠.”


명절에 만난 친척들과 서로 아끼는 마음은 있지만 할 말은 없어서 쏟아내는 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예전처럼 편안하게 대화하기 전에 하는 아무 말, 처음 대면한 사람과 알아가는 과정에서 나누는 의미 없는 말. 사실 상대에게 적확하게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그러니까 할 말이 없어서 하는 말 중엔 예상치 못한 오지랖이 발동할 수 있다.


파주의 헤이리도 마찬가지다. 헤이리를 지독히 사랑하고 궁금해서 내게 묻는 게 아님을 충분히 알고 있다. 당장 할 말이 없을 때 반사작용처럼 나오는 말이다. 그래도 할 말 없다고 아무 말 없이 침묵하는 사람보단 “파주면 헤이리?”라도 묻는 사람이 확실히 다정해서 좋다. 함께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거는 다정한 사람들.

헤이리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곳입니다. 신청곡을 쓰기 위한 연필과 메모지, 연필깎이가 테이블마다 있어요.

나 역시 그렇게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순간이 있다. 대신 ‘파주면 헤이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나만큼은 지역의 명소나 명물 이야기는 피하고자 한다. 부산 사람에게 “해운대?”를 묻지 않고, 속초 사람에게 “닭강정?”을 묻지 않기로 한다. 여수 사람에게 “여수 밤바다?”를 묻는다고 버스커버스커가 소환될 게 아니라면 대답하기도 애매한 리액션은 안 하는 게 나을 듯싶다. 생각해보니 결혼 전엔 내가 인천 산다고 하면 사람들이 하도 “월미도?”를 물어서 웃겼다.


그렇게 어색한 자리, 조금 어려워서 할 말 없는 사이지만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뻔해지고 싶지 않으면 차라리 그 지역의 미세먼지나 물어보자. 할 말이 없을 땐 공기의 안부나 물어보는 거다.

“천안 분이세요? 천안은 공기질이 어떻습니까?”

“아, 군산에서 오셨군요. 그곳은 미세먼지 없이 쾌청한가요?”


어느 지역이든 미세먼지는 있고 없고 반복되니까 무슨 말이라도 주고받으며 다음 화제로 넘어가기 위한 나의 궁여지책이다. 세상 쓸모없는 미세먼지를 대화 소재로라도 활용하며 할 말 없는 순간을 모면할 것.

왜냐면 우린 사실 서로에게 할 말이 없으니까요,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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