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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04. 2020

내 꿈이 날 모욕해

꿈, 정준일

꿈, 정준일

     

마음속이 온통 흙바닥이었다. 그 사이사이 돌부리까지 박혀있어 발끝을 타격했다. 위를 올려다봤는데 해도 달도 보이지 않았다. 손에 닿지 않는 시커먼 구의 형태 속에 갇혀있는 것만 같았다. 황폐한 흙바닥에 누워 울어버리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텅 빈 날들을 보냈다.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누추해지는 이 암흑기는 내가 세 번째 투고를 마친 이후의 시간들이다. 첫 책의 원고를 투고할 때는 투고 방법을 잘 몰랐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잘 몰라서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다. 책을 내본 적도 없고 어떤 검증도 이뤄지지 않은 나라는 사람이 쓴 글을 출판사가 선택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미리 체념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책의 원고는 투고한 지 한 시간 만에 걸려온 전화로 시작해 계약 의사가 있는 출판사들로부터 전화를 꽤 받았다. 첫 책을 낼 때와는 온도차가 너무 커서 어안이 벙벙한 날들을 보냈고, 연락을 받은 출판사 중 마음에 드는 몇 곳과 미팅을 진행한 후 그중 한 출판사와 계약을 했다. 아마 이때 자신감이 지나치게 상승했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책에 들어갈 추가 원고들을 탈고한 뒤 세 번째 책으로 내고 싶은 원고들을 썼다. 세 번째 책을 상상하며 쓴 글들은 결이 조금 달랐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책은 경험과 감정을 살려 쓴 에세이지만 적지 않은 현실비판이 녹아있는 글들이었다. 그 글들을 쓰면서 다소 냉정하고 날카로워진 나머지 눈매마저 사나워진 나를 세 번째 책을 준비하며 다독이고 싶었다.


마음을 다해 쓴 글들이었다. 태어나 지금까지 먹고살며 쌓아온 감정과 경험을 글로 옮기며 무척 행복했고 따뜻했다. 이 행복이 책이라는 형태로 태어나 세상에 뿌려지길 원했다. 그리 될 거라는 단단한 믿음도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쓴 모든 글들을 합쳐 가장 자신 있는 결과물이었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기대는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다.


스무 편이 조금 넘는 글을 쓴 다음 몇 가지 샘플원고를 다듬어 출판사에 투고를 했다. 두 번째 투고를 할 때처럼 전화가 쏟아질까 봐 휴대전화를 소리로 설정해놓고 잠시 여유를 즐겼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그 사이에 전화는 오지 않았고 몇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모두 거절하는 내용이었다.

‘설마, 이것으로 끝은 아닐 거야.’


다시 기다렸다. 기다림은 롤러코스터의 정점에서 바닥으로 향하는 영겁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난 후 나의 세 번째 투고는 완벽한 실패였음을 인정해야 했다. 설마, 했던 끝은 그렇게 다가왔다. 지난해 겨울의 초입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 겨울에 업무가 바쁘지 않았다면, 온갖 경조사를 챙기느라 정신이 쏙 빠지지 않았다면 나는 우울의 나락에 빠져 사람답게 살지 못했을 것이다. 지독한 암흑을 살았다. 그토록 자신 있게 쓴 원고가 버려졌다는 기분, 선택받지 못했다는 데서 오는 박탈감이 칼바람 쳤다.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그 원고들은 투고와 동시에 브런치에 공개했고 많은 독자들의 반응과 조회수를 확인했지만, 정작 책으로 완성하고 싶었던 마음이 강해서인지 출판사들로부터 거절당한 경험은 내게 커다란 실패의 낙인이었다.


다시금 글쓰기를 시작한 무렵으로 돌아갔다. 어린 시절 이면지에 끼적이며 적던 독후감이며 일기, 상장의 가짓수를 늘려가며 주눅 든 어깨를 펴주던 글짓기 대회,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쓰던 20대, 기자생활. 그리고 30대에 이르러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붙잡은 글쓰기라는 재능. 글을 쓰는 재능은 자신을 덜 미워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어디에나 있는 흔한 얼굴로 사는 나를 세상에 드러내 준 것도 글쓰기였다.


그런데 그 재능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투고를 모두 거절당하고 나니 자신이 그리 싫어질 수가 없었다.

‘어쩌면 나는 잘 쓰는 사람이 아닐지도, 작가로서 재능이 없을지도.’


심각하게 절필을 고민했다. 컴퓨터를 켜는 것조차 싫어졌다. 그 와중에도 업무는 쏟아졌고, 밖에 나가서는 하하호호 웃으며 대화를 하고 글을 쓰며 일을 했다. 겉으로 보이는 나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속에 들어있는 나는 병들어 있었다.


그래서 잠자는 동안 벌어지는 꿈과 실현하고 싶은 이상을 말하는 꿈이 똑같이 생긴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사라져 버리는 꿈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과 이상이 허무라는 같은 얼굴을 가진 건 정말 우연일까?


그리고 혹독한 그 겨울을 앞두고 어쩌면 나와 비슷한 고민과 아픔을 겪었을 뮤지션은 내 마음과 같은 얼굴을 한 <꿈>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정준일의 <LOVE YOU I DO> 앨범 표지
난 끝났어 다신 못 돌아와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것도 묻지 마
날 괴롭히지 마 날 사랑하지 마 난 예술한 거 아닌데 난 예술가도 아닌데
어제도 그랬어 오늘은 더 그랬어 하루를 또 망쳤어 내일을 낭비했어
아프면 아프다고 슬프면 슬프다고 말하는 게 뭐 어려워 말하는 게 난 어려워     
사랑도 이름도 내일도 꿈을 꾸던 하루가
더 불행했었던 날들이라고 말하면 난 너에게 질문이 되는 걸까?
이별을 실패를 운명을 인정할 수 없는 게 내 탓 만은 아니잖아
날 미워했다고 말해버리면 나는 영원 속에 갇히는 걸까     
부서져 버렸어 난 갈 곳을 잃었어 원망도 못하고 후회할 수도 없다는 게
그니까 너는 어때? 네 꿈은 견딜만해? 난 여전히 참 어려워 내 꿈이 날 모욕하는 게     
괜히 마음만 더 아프잖아 사랑해서 더 미운 거야
난 두려워 나도 날 떠날까 봐
난 무서워 시들어가는 나의 노랠 들으면
아무 고통도 없이 어떤 눈물도 들리지 않는 깊은 영원 속으로     
정준일의 <꿈>     


꿈이 나를 모욕한다고 느끼며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해를 넘겼다. 우울은 극에 달했다. 다행히 연초에 두 번째 책이 출간되고 자신감을 조금 회복하면서 수렁 밖으로 나와 젖은 옷을 말리고 얼굴을 닦았다.


좋아서 쓴 소중한 작품들의 세속적 실패를 인정할 수 없는 건 내가 못나서, 못 써서, 재미없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인정하지 못한다면 실패에 갇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내가 내 꿈을 너무나 사랑해서 꿈이 주는 모욕과 실패를 받아들이는 것도 내 몫이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렇게 자신을 미워하면서도 다음 스텝을 찾아야만 하는 이치를 억지로 마주하며 나는 그렇게 예술가도 아닌 하나도 멋지지 않은 작가이자 어른이 되고 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성공담이 있다. 성공담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정보이기도, 혹은 미치도록 드러내고 싶은 이들의 겸손을 가장한 자랑일 수도 있다. 얼핏 보면 남들은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 같고, 책도 쉽게 내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제야 나는 그 성공담들에 얼마쯤 허구가 섞여있는지 알 것 같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그렇게 보일 수 있다. 실제로 두 번째 책의 카테고리가 처세, 성공담이 될 수도 있다는 편집자의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딱히 성공한 적이 없는 인생인데 성공했다고 분류하면 독자들을 속이는 게 아닌가.’하고 밤잠 이루지 못했다.


그럼에도 내 삶에 성공이란 이름을 붙인 리뷰와 독자들의 따뜻한 이메일을 받으면 뒤뚱거리던 삶에 무게중심이 잡히는 게 느껴진다. 무게중심은 다시금 꿈이었다. 허무하고 한없이 가벼운 이름으로써 꿈. 자신을 싫어하지 않기 위해 쓰기 시작한 글이 자신을 한없이 싫어지게 만들었던 꿈.


절망한 나머지 꿈에서 도망친다 한들 결국 새로 만드는 꿈에 편입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기에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그리고 다시 쓴다. 꿈이 나를 떠나는 순간이야말로 희망 없는 시절이라는 깨달음을 품고 다시 쓰며 구멍 난 꿈을 꿰어간다.      


정준일의 꿈


이 곡이 궁금하다면 위의 링크를 타고 유튜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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