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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04. 2021

부지런한 사랑, 이슬아

새해 첫날 나를 찾아온 책

대개 책을 ‘골라’ 읽는다. 필독도서, 베스트셀러 등의 이름이 아무리 붙어봐야 내가 완독하는 책은 내가 고를 뿐이다. 서점 사이트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장바구니에 턱턱 담아 구입하든가 아니면 도서관에서 서가를 돌며 마음에 드는 책을 딱딱 담아온다.


하지만 간혹 책이 나를 찾아온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내가 골라오긴 했는데 나의 상황과 감정에 퍼즐처럼 들어맞아 뒤흔드는 책을 만날 때다. 마치 지금 이 순간 내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인쇄소의 짙은 잉크 냄새를 거쳐 다가온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운명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책이다.

혹은 내가 지독한 고통을 겪을 때 “나 지금 빨리 도란에게 가봐야 해. 걔 지금 난리 났다고. 지금 걔한테 내가 꼭 필요하다니까?”라면서 정감 넘치는 지인처럼 구는 책을 만날 때도 찾아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은 내게 찾아왔다. 미리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아니고, 도서관의 신착도서 목록에서 많이 들어본 이름의 책에 예약을 걸어둔 것뿐이었다. 그리고 때가 돼서 책을 찾아가라는 연락을 받았고, 미용실에 가느라 집을 나선 김에 도서관에서 책을 받아왔다.

이 책을 기다리고 고대한 순간은 없지만 우연의 더미가 쌓이고 그 속에서 책이 역으로 나를 선택했다. 이윽고 내가 책을 펼친 순간은 하필 2021년 1월 1일. 그야말로 운명의 데스티니다.      


이슬아 작가는 스물셋 젊은 나이에 스스로를 ‘글쓰기 교사’라 칭하며 아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 글쓰기 수업이 필요한 곳은 마다하지 않고 출근해 아이들을 만나 글쓰기를 가르쳤다. 가르침이라는 것. 나 역시 짧게나마 겪어본 가르침의 뜨거운 보람과 기쁨을 그는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글 속에서 누렸다.      

글쓰기 수업에서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커서 네가 될 거야. 아마도 최대한의 너일 거야.” 로맹 가리도 결국 로맹 가리가 되었다. 반복적인 글쓰기와 함께 완성된 최고의 그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그저 다음 주의 글감을 알려주며 수업을 마친다. 얼마나 평범하거나 비범하든 간에 결국 계속 쓰는 아이만이 작가가 될 테니까.      


2020년은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힘든 한 해였다. 사실 상반기에는 반백수나 다름없었다. 코로나 프리랜서 지원금을 신청하기 위해 확인한 소득 감소율 –98%라는 수치를 목격했을 때 나는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 입을 틀어막았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광복절을 지난 무렵 집단감염이 시작될 때는 약하게 코로나 블루를 겪기도 했다. 정기적인 상담을 받았고 남편과 주말마다 외출을 하고 운동시간을 늘려가며 겨우 극복해냈지만, 우울은 언제고 기다렸다가 내 통수를 후려치고도 남을 놈이다.      


어렵사리 그 난관을 빠져나왔고 오히려 하반기에는 일이 꽤 많아 지치기도 했지만 침체된 시절로 인한 상처는 온전히 달래지 못한 상태였다. 질병에 무너지는 지금의 나보다 좀 더 괜찮은 내가 되고 싶었다. 남들 눈에 괜찮은, 적당한 나 말고 내가 좋아하는 내가 되고 싶었다.


사람들은 나를 책을 세 권이나 낸 작가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아무 사심 없이 그래서 다음 책은 언제 나오냐고 묻기도 하고, 인세 좀 많이 벌었냐는 가벼운 질문, 그리고 원래 작가들은 책 낼 때 다음 책까지 계획돼 있는 거 아니냐고  물어올 때면 멍해지곤 했다. 나만 뒤쳐진 작가 같아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계획이 빼곡타인과 달리 텅 빈 다이어리를 뒤로 감추는 기분이랄까.

와, 책 내는 게 나만 힘든 거였어? 다들 그렇게 계약이 쉴 새 없이 맺어지는데 나만 이렇게 띄엄띄엄 계약이 이루어지는 거였어?


그럴 땐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은 채 스스로 위로하는 게 힘겨웠다. 태어난 이래 게을러 본 적 없는 삶에 무엇을 갖다 비교하나 싶으면서도 은연중에 진한 위로를 찾고 있었나 보다. 매번 쉽지 않고 지름길이 보이지 않는 삶이 위축되던 때였다.      


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 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는 반복 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 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재능은 기쁜 단어이자 아픈 단어다. 한 번씩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자신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가, 제일 낙오자로 만들기도 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슬아 작가가 재능을 명료하게 설명한다. 나는 갑자기 어린 제자가 된 기분으로 그 위로를 받아들였다. 바로 새해 첫날, 나를 찾아온 책이 스스럼없이 쏟아놓는 글쓰기 수업 경험담 덕분에 말이다.      

아이들이 소년의 마음으로 쓴 소년의 글을 벗어나려고 할 때 나는 복잡한 심정이 된다. ‘아마도 너는 이제부터 더 깊고 좋은 글을 쓸 거야. 하지만 마음 아플 일이 더 많아질 거야. 더 많은 게 보이니까. 보이면 헤아리게 되니까.’ 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래도 살아갈 만한 삶이라고, 태어나서 좋은 세상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런 세상의 일부인 교사가 되고 싶다.      


명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말이라고 연락이 좀 왔다. 그중에는 내 수업을 들은 분들의 안부도 있었다. 생각해보면 올해 초 두 번째 책이 나온 이후로 글쓰기 수업 의뢰가 줄곧 들어왔다. 하반기에는 주로 온라인 수업을 맡아 카메라 앞에서 목 아프게 강연을 했고, 20대 초반의 풋풋한 청년부터 백발의 70대 어르신까지 내 목소리에 집중했다.


가장 감동했던 날은 50~70대 어르신들 대상의 온라인 수업이었는데, 수업을 모두 마치고 양손으로 반짝반짝 별 모양의 소리 없는 박수로 채워진 화면을 봤다. 그땐 잠시 눈시울이 따끈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내게도 수줍은 ‘선생님’의 경험이 있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말에 나를 선생님으로 칭하며 안부 메시지들이 도착했을 땐 정말 고마웠다. 내가 준 가르침이 그래도 어딘가에서 쓸모를 발휘하고 있음에.      


새해를 기다리며 마음먹은 게 있다. 이제부터 내가 좋아할 만한 내가 되기 위해 행동하자고 말이다. 여기서 행동이 중요하다. 그 첫 단추로 12월 31일 나는 개명신청을 했다. 글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싫어했던 내 이름, 본래 한자가 옥편에서 사라지는 바람에 동사무소 아저씨가 적당한 한자를 넣어 등록한 내 이름을 이제야 떼어내고 새 이름을 그 자리에 박아 넣기로 한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으니 ‘그냥’ ‘대충’ 싫은 이름을 넘길 수야 있지만, 그냥과 대충 대신 좋아하는 내가 되기 위해 기어코 이름을 바꾼다. 그리고 좋아할 만한 내가 되기 위해 올해는 무수히 행동할 일만 남았다.

2021, 숫자도 참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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