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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03. 2023

나에겐 징크스의 섬이 있다

나의 독서 친구들에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흔하다면 흔한 여행지 제주도를 나는 조금 늦게, 스물여섯에 처음 가봤어. 그것도 혼자.


고등학교 졸업여행이나 수학여행 정도는 제주도를 많이도 갔는데 내가 중학교 무렵엔가 IMF가 터져서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거든. 솔직히 제주도나 설악산이나 돈 드는 건 비슷한데 그냥 구색 맞추기용 절약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10대에는 못 가봤고, 20대가 되면서 제주도는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는데 또 못 갔어. 스무 살 넘어가면서는 친구들이 제주도를 꼭 남자친구랑 가더라고. 여자들끼리 가도 되는데 왜 그랬을까. 아무래도 운전하는 남자친구랑 가는 게 편해서일 수도 있고, 낭만 때문일 수도 있겠지.


그렇다고 내가 남자친구가 없던 것도 아니고, 제주도 가자는 남자도 꽤 있었는데 스물여섯 될 때까지 못 갔어. 왜냐하면 이게 정말 중요한 건데, 분명한 이유가 있어. 남자친구랑 제주도를 가기로 약속만 하면 정말 이상하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생겨서 그 남자랑 깨졌거든.


진짜 신기했어. 제주도 가기로 약속했다 깨진 남자만 여럿이야. 내가 찬 적도 있고, 내가 차인 적도 있어. 한 번은 좀 싫어진 상대가 있었는데 제주도 갔다 올 때까지만 사귈까 생각도 했다니까. 결국 못 참아서 헤어졌지만.


그게 쌓이고 쌓이니까 징크스가 되더라.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남자 하고는 제주도를 못 갈거라 생각했어. 정말 좋아하는 남자가 제주도에 가자고 애원하면 나는 어쩌지? 그런 생각도 했지.

그러다 스물여섯 살에 내가 정말 좋아하는 남자친구랑 또 제주도를 계획했는데 차였어. 제주도 때문에 매달려볼 생각도 했어. 미쳤나 봐. 아무튼 헤어졌어. 정말 짜증 나더라. 그래서 다 취소했는데 뭣 때문인지 이렇게 제주도의 징크스를 유지할 수 없다 싶어서 혼자 여행을 준비했어. 6월이라 성수기였는데 1인 표는 종종 취소표가 있어서 비행기는 금방 구했고, 도미토리 게스트하우스도 쉽게 구할 수 있었어. 그렇게 나는 첫 제주 여행을 26살 때 혼자 떠났어.


어땠냐면, 되게 좋더라. 제주도에 드디어 발을 들였다는 사실에 미쳤나 봐. 거의 조증 상태였어. 나 거기서 만난 사람들이랑 지금도 연락한다. 가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풍경 고르고 골라서 구경하고 짬 내서 강정마을에 가서 구럼비 지킨다고 시위도 했어.


어쩌면 수년간 나를 사로잡았던 징크스는 나 스스로 만든 캐릭터일 수도 있고, 그런 징크스를 의식하느라 나답지 않은 언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쨌든 스물여섯에 제주를 다녀왔는데 그 후로도 징크스는 계속 됐어. 그래서 서른두 살까지 제주에 안 갔어.


그러다 문제가 또 생겼어. 서른두 살에 지금 남편하고 연애하고 결혼을 준비했는데 결혼식 한 달쯤 앞두고 제주도에 가자는 거야. 아, 운명의 장난이 시작됐구나. 이젠 제주도가 나를 파혼까지 시키려나보다. 무서워지기 시작했지. 오죽하면 우리 엄마도 말렸어. 너 **이랑 제주 갔다가 헤어지면 어떡하니 이러고. 물론 나중엔 기분좋게 허락해주셨지만.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 갔어. 제주도 갔다가 헤어지면 그냥 비구니 될 생각으로 갔어.


그리고 우리는 헤어지지 않았어. 물론 약간의 위기는 있었어. 내가 거기서 본성을 드러내는 바람에 택시기사랑 엄청 심하게 싸우고 도로 한중간에 내렸거든. 인도도 없는 곳이라 차도 옆 좁은 길을 나랑 남편이 일렬로 걸었는데. 내가 싸우는 모습 보면서 남편은 ‘지금 도망가라는 조상신의 계시인가’ 생각했대. 둘이 앞뒤로 서서 걷는데 하필 비도 오더라. 나 그때 비 맞으면서 파혼각인가 생각했거든. 엄마말 들을걸, 이래서 어른 말 들어서 나쁠 게 없는 거구나, 그러면서 속으로 쫄아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에서 우리는 또 좋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비도 피하고 역경도 피했어. 그랬으니 지금 결혼해서 9년째 살고 있는 거겠지. 나의 제주는 그런 곳이었어. 징크스의 섬, 징크스의 여행지. 결혼 후에는 제주도를 놀러도 가고 일하러도 자주 갔는데 한 번씩 싸늘해져. 혹시 지금 이 섬이 나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건 아닌가 흠칫흠칫 하는 거지.

그렇게 징크스에 당해놓고도 나는 아직 징크스에 단단히 붙들려있어. 외출할 때 시계를 안 하면 사나운 일이 생기고, 손톱이 부러지면 누군가와 갈등을 겪는 징크스가 있지. 이런 징크스를 의식하느라 내가 더 괴로운 선택을 하는 걸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제는 조금 나아진 것 같아. 징크스가 나를 짓누르는 신호가 올 때면 차근차근 나의 이별을 준비하던 제주도를 떠올리지. 내 연애를 망치던 제주도를 떠올리지. 내가 말이야, 징크스를 두고 제주도도 이겼는데 말이야, 뭐가 두려울 게 있나 그런 마음으로. 징크스 깨느라 나는 제주도와 겨룬 사람이라고 아주 위풍당당하게 말이야.


그리고 이제 결혼하고 연애할 일이 없어서 그런가? 이제 제주도가 아주 만만하지 뭐야. 십 년 넘게 시달렸던 징크스의 섬 제주도는 이제 당장 손가방 하나 챙겨서 풍덩 떠날 수 있는 예쁜 섬이 되었어.      


이쯤 되니 궁금하다. 내 연애를 훼방하던 섬도 있는데 내 행복을 북돋워주고 지지해 주는 그런 여행지는 없을까? 있었는데 내가 지나쳤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집에 가면 한 번 천천히 찾아봐야지. 나의 응원군 여행지는 어디였을까?





6년째 독서모임을 하고 있어요.

이번에 모임에서 김민철 작가의 <우리는 우리를 잊지 못하고>를 읽었는데,

모임날 발표할 리뷰 대신 적어본 편지글이에요.

독자님들과도 공유하고 싶어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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