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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23. 2022

비둘기의 객사

기대앉아 잠든 할머니처럼, 느른한 햇살에 오수에 빠진 사람처럼.

며칠 전, 햇살이 따가운 낮에 모카와 산책을 나갔다. 완연한 가을은 시선을 정면이나 위쪽으로 자꾸 끌어당긴다. 커다란 플라타너스가 진한 베이지색 잎사귀를 떨구는 계절. 


그리고 그 플라타너스 뿌리가 굽실거리는 아래쪽으로 모카가 킁킁거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아차, 싶어 모카를 끌어당겼다. 플라타너스의 뿌리 일부라 생각했던 형체가 비둘기였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회갈색의 몸에 아주 작은 하얀 무늬가 깃털에 새겨진 비둘기였다. 새들은 옆으로 누워 죽을 거라 생각했는데 모두 그런 건 아닌지 비둘기는 앉은 채 죽어있었다. 기대앉아 잠든 할머니처럼, 느른한 햇살에 오수에 빠진 사람처럼, 눈을 감고 바닥에 뭉특하게 자리를 잡은 비둘기는 틀림없이 죽어 있었다. 


모카는 죽음의 냄새를 맡은 건지, 본능적으로 동물의 위기를 느낀 건지 자꾸 비둘기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는 수 없이 그 자리를 빨리 떴다. 하지만 돌아가는 내내 마음은 자꾸 비둘기로 향했다.


그 비둘기는 알을 깨고 나올 땐 뭔가 희망찬 삶을 시작하지 않았을까. 부모새처럼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도시의 진풍경을 내려다보는 새의 삶 말이다. 원하는 삶을 살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 끝이 객사일 거라 생각은 못했을 터다. 비둘기의 집이 플라타너스 뿌리가 아닌 이상 집이 아닌 객지에서 죽은 것이다. 너무나 외롭고 싸늘한 비둘기의 객사.

어쩌면 도시에 사는 비둘기는 모두 객사할지도 모른다. 자기 집을 벗어나 날아다니고 떠돌아다니다 생을 마감할 가능성이 크다. 그 집이라는 곳도 비둘기에게 얼마나 안락을 줬을지는 모르겠다만, 대부분 객사할 운명의 존재라는 건 명징한 슬픔이다. 


다음날 나는 다시 비둘기가 객사한 길가로 산책을 나섰다. 오늘도 그대로 죽어있다면 뭐라도 덮어두거나 옮겨줘야 할 것 같아 집에서 큰 손수건 한 장을 챙겨 나왔다. 신기하게도 죽은 비둘기의 위에는 공책을 펼친 만큼 커다란 플라타너스 잎이 내려와 앉아 있었다. 플라타너스가 객사한 비둘기가 안타까워 잎새를 내려보낸 건지, 지나가던 행인이 주워다 덮어둔 건지 알 수 없다. 


가을색이 완연한 플라타너스 잎사귀 아래로 비둘기의 하얀 무늬가 보였다. 객사한 비둘기는 잎사귀 밑에서 쉬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나 피곤해 인심 좋게 생긴 플라타너스 밑에서 잠들었다가 그대로 생을 마감했기를, 고통을 느끼기엔 그저 졸렸기를 바랐던 비둘기의 객사였다.


+ 10월 말경 적었던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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