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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09. 2022

카톡 없는 세상에서

카톡 없어도 세상 살 만하다고.

“서비스 운영정책 위반으로 카카오톡 사용이 제한되었습니다…60일간.”

“... 제가요?”


지난 10월 내게 벌어진 일이다. 평소 경계심이 강한 내가 당했다. 피싱의 경각심을 깨우치는 메시지가 그렇게 들고나는 시대를 살면서, 내겐 결코 벌어질 거라 생각도 못했던 일, 카카오톡 도용을 당하고야 말았다.

도용을 당한 줄도 모른 채 한창 바쁘게 마감을 하던 중이었다. 두피에 땀이 삐질삐질 날만큼 바쁜 날이었다. 그런데 카카오톡이 이상했다. 핸드폰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할 만한 메시지를 확인했다. 심각한 운영정책 위반사유가 확인돼 60일간 카카오톡 사용이 제한된다는 내용이었다. 오류인 줄 알았다. 앱을 지우고 다시 깔았다. 똑같은 메시지가 떴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당했다는 사실을.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도용당했음을 깨달은 순간, 몸 안에 피가 뽀글뽀글 기포를 만들어내는 듯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눈앞도 어질어질했다. 카카오톡이 자꾸 꺼지는 듯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친구로 추가돼 있어 급히 비밀번호를 바꿔서일까. 다행히 금전적 손실은 없었다.


하지만 2022년의 대한민국을 살면서 카카오톡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가? 예상은 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의 의사소통을 카카오톡으로 한다. 카카오톡 대신 다른 메신저나 문자메시지를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저 대체다. 우리는 이미 수년간 카카오톡과 한 몸이 되듯 익숙해진 상태다. 카카오톡이 없다면 대화는 용건으로 전환한다. 다시 말해 카카오톡이 없다면 대화 대신 용건 위주의 연락을 취하게 되고, 소속감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카카오톡으로 가입하고 사용하던 서비스에 마비가 온다. 만약 카카오계정으로 가입해 사용했다면 계속 사용할 수는 있다. 내 경우 자주 사용하던 카카오 택시를 사용할 수 없었고, 카카오페이와 카카오 뱅크는 사용할 수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탈퇴했다. 정기적인 모임을 하던 단톡방을 이용할 수 없으니 애를 먹었고 업무적으로 연락하던 모든 클라이언트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이 방심한 틈으로 밀려 들어온 가해자 때문이라는 사실에 열패감이 치솟았다. 타인의 느슨함을 비집고 들어와 이득을 취하려는 검은 자들이 있었다. 도용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카카오에 도용신고를 했고 경찰에도 신고했다. 경찰서에 가서 정식으로 접수하고 진술도 하러 갔다. 이런 사건은 가해자를 잡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진술 과정에서 그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하는 건 또 다른 아픔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창밖을 보고 있는데 세상이 참 고요했다. 카카오톡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사람들의 소식과 멀어져 집안에 격리된 것만 같았다. 물론 도용 소식을 주변에 알리고 혹여나 피해 입은 사람이 있을까 연락을 돌리면서 많은 위로를 받긴 했다. 특히 단체 문자를 보낸 이후 부리나케 전화를 걸어온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웠을 일이다.


자괴감은 또 어쩔 일인가. 자랑 같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꼼꼼하다고, 똑 부러진다는 평을 늘 들어온 나였다. 나 역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뭐하나, 이렇게 당하는 것을.


자신이 이토록 허술한 인간인 줄 꿈에도 몰랐던 나는 도용당한 날 신고를 마친 뒤 꼬박 밤을 지새웠고, 남편이 출근한 뒤에는 바닥에 앉아 눈물만 줄줄 흘렸다. 진술하러 경찰서에 가서는 범죄피해자를 위한 심리상담을 권유받을 정도였다.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면 울먹이는 티를 내지 않으려 담담하게 말했지만, 그나마도 감추지 못해 우는 걸 다 들켰다. 이런 날 바라보는 모카를 끌어안고 엉엉 울기도 하고, 밥도 넘어가지 않았다.

‘이렇게 멍청한데 밥은 먹어 뭐하나.’

‘도용이나 당하는 인간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이런 우울에 사로잡혀 꺽꺽대는 날을 보냈다. 그러다 누군가 도용에 대해 물어오면 다시금 눈물이 터진다던가, 또 얼마쯤 지나 누군가 카톡은 언제부터 쓸 수 있냐는 말에 또다시 울먹거리다 들키는 일이 다반사였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는 사람들과 공유하던 자잘한 소식과 정보를 차마 문자메시지로 보내는 게 부끄러워 혼자 삭혔다. 용건이 있어 문자메시지를 보내 놓고는 답장이 오지 않아 혼자 서운해하기도 했다.


그깟 메신저가 대수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수년간 카톡이라는 끈으로 엮인 연결고리의 힘은 대단했다. 고립된 기분을 이끌고 나는 하루를 또 하루를 엑스표치듯 넘겨야 했다. 


첫 일주일 정도는 너무 불편했다. 이용제한을 당한 걸 잊고 메신저를 열었다가 아차, 싶어 다시 닫고 잠시 멍해졌다가 전화번호부를 뒤지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일주일쯤 더 지나서는 다른 메신저를 찾아봤다. 업무 때문에라도 메신저 하나쯤은 써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씩, 벽돌을 쌓듯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벽돌이 쌓여갈수록 나는 또 무덤덤해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었다. 습관처럼 카톡을 누르는 일이 없어졌고, 필요한 정보를 공유할 땐 URL를 복사했다.


카톡 대신 문자를 보내긴 했지만 문자메시지가 습관이 되지 않다 보니 용건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내 쪽에서 전화를 거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 상대는 카톡을 사용하지 않는 나의 상황을 깨닫고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쨌든 웃으며 통화하는 순간이 많았다. 통화할 일이 별로 없던 이들과 통화하는 기분은 늘 산뜻했다. 카톡을 할 때는 흐릿했던 통화의 감각을 다시금 각인하는 경험이 생겼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일을 하든 나가서 시간을 보내든 흐름을 툭툭 끊던 카톡이 없으니 나름의 홀가분함이 생기는 거였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늘 많았던 정보와 알람은 모두 카톡을 통해 전해져 왔으니 말이다. 물론 내 일상에 필요한 정보가 대부분이었지만, 가끔은 이 모든 걸 다 알아야만 하고 챙겨야 한다는 사실이 버거울 때가 있다. 사사로운 정보와 간섭으로부터 도망쳐 한갓진 시골길을 걷는 기분이랄까.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 준비를 할 무렵이었다. 갑자기 이질적인 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카톡.”


처음엔 그게 카톡 알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디서 무슨 소리가 났다고 갸웃, 했는데 내 핸드폰에서 난 소리였다. 폰을 열어보니 메시지가 하나 와있었다. 상대는 내 카톡이 안 되는 걸 모르는 이였는데, 무심코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러니 카톡은 60일 이용제한을 마치고 사용할 준비가 끝났음에도 적응의 벽돌을 쌓은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그 정도로 카톡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오히려 정적을 깨는 카톡! 소리에 고요한 일상이 우지끈 무너지는 감정까지 들 정도였다.


이용제한을 당했을 당시에는 언젠가 이 경험을 글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내가 괜찮아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많이 해봤다. 도용을 당한 나의 허술함과 모자람에 자신이 너무나 싫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싫어서, 싫어져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딘가에 덩그러니 놓여 썩어 없어져 버리고 싶을 만큼 자신이 싫어졌었다. 사실 카톡을 못 쓰는 불편보다 스스로를 싫어하는 마음을 복구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적응의 벽돌을 쌓는 동안 상황을 조금씩 받아들이게 됐고, 예전보다 경각심이 두터워진 새로운 버전의 나로 돌아왔다. 그게 카톡 없는 세상에서 살아 돌아온 나의 결과물일 것이다.

잠시 인적 없는 시골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느슨했던 체계를 견고하게 땋아 올린 존재로서.

그래서 이제야 솔직하고 뻔뻔한 한줄평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카톡 없어도 세상 살만 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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