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Nov 12. 2024

그 문을 열기에 앞서

도어, 서보 머그더

다 읽고 난 뒤에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한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에메렌츠를 내가 죽였다'는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후반부에 굉장히 격정적인 갈등이 생기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로 내가 느낀 건 따뜻함, 서로 다른 두 여성이 천천히 쌓아가는 유대감이었다. 


글 속에서 ‘나’는 유명한 문학상을 받는 것으로 보이는 지성인이고, 남편 역시 지식인으로 보인다. 그 대신 가사에는 서툴러서 탁월하게 가사를 해내는 에메렌츠를 고용한다. 그렇지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를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겨우 호칭만 고용주와 고용인 같다) 오히려 고용주가 고용인에게 쩔쩔매는 모습이고, 중풍으로 쓰러진 에메렌츠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얼핏 고집스럽고 꽉 막힌 데다가 완강한 신념을 주장하는 에메렌츠는 조금씩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파란만장한 역사를 관통한 에메렌츠는 오직 화려한 무덤만을 꿈꾸며 살아온 자다. 그런 에메렌츠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굴욕도 꿋꿋하게 견디며 ‘나’는 곁을 지킨다. 그 둘은 세상에서 오직 그들만이 형성할 수 있는 끈끈한 우정을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에메렌츠를 지켜보는 ‘나’의 시선이 고집불통 에메렌츠를 바라보는 책 밖 독자의 시선과 겹친다고 느꼈다. 


에메렌츠는 결국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에메렌츠가 나에게 남긴 유산은 모두 훌륭한 걸작이었지만 손을 대기만 해도 으스러져 가루가 되어버리는 오랜 물건들이었다. 그 모습은 하루아침에 무너져 생을 마감한 에메렌츠와 닮아있었다. 

책을 덮은 뒤 이 책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말할 수 있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책이었다. 가루처럼 스러져가는 삶이라든가,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둔 문의 안쪽이라든가, 마치 상극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로를 너무나 아끼는 사람이라든가. 그들이 서로 닮아가는 모습이라든가. 글의 마지막에 미성숙한 이웃을 보듬어주는 마음이라든가.


최근에 엄마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어떤 이유로 엄마와 거리를 두고 지내고 있는데 그래도 중요한 소식은 어떻게든 들어올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데다 자신만의 오래된 가치관으로 내게 무수한 상처를 준 사람이 나의 엄마고 그런 모습이 에메렌츠와 같은 결을 지니고 있다. 


나는 아직 엄마의 문을 열고 들어가 볼 다짐을 하지 못했다. 허락된 문을 열고 들어가는 용기, 용서할 용기, 이해할 용기. 그 무엇 하나 쉬운 게 없기 때문이다. 작가인 ‘나’가 아무 말 없이 병실에 드나들 듯 나는 그렇게 문의 바깥을 서성인다. 서성이고 서성인다. 책의 제목이 ‘도어’인 건 대개의 사람들에게 이처럼 어렵고 육중한 문이 하나쯤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설계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