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내가 이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남편이 물었다.
“시각장애인이 어떻게 책을 써?”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시각장애인이 글을 못 쓴다고 생각하냐며 얕게 핀잔을 줬다.
점자 키보드는 흔하기도 하고, 예전에 장애인 교사 교육보조기기 지원사업을 취재해보니 활용할 만한 도구가 정말 많았다. 겁나도록 비싼 게 흠이었지만.
그런데 나도 뭐 다를 게 없다. 저 얘기가 나오자마자 요즘 세상을 들먹거렸다. 요즘 세상, 요즘은 좋아졌다, 이런 말이 가진 오류와 비겁함을 아주 잘 알면서도 쉽게 요즘 세상을 들먹거렸다. 요즘 세상, 그 좋아졌다는 요즘 세상에서도 차별과 편견은 대활약한다.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의 저자도 그런 순간들을 줄곧 만난다.
타이베이로의 출발, 그것은 왜 우리끼리는 안 되냐는 반항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거절과 더 많은 모욕과 조롱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52p
내 몸 불편하니 어린애를 눈으로 써먹자고 낳으라니요? 어머니는 이 몸을 하고 장성한 자식 주고 싶어 김치 담그셨다면서요. 어린애 부려먹고 살라는 이야기는 그만하세요. - 120p
어디 책에 적힌 게 전부일까. 수많은 조롱과 멸시와 동정을 경험했을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곧게 자기 길을 간다. 특히 시력을 잃기 전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열다섯살 저자의 모습은 읽는 동안 가슴이 아릴 정도였다.
내가 학교에 가지 않는 이유는 생계 때문이 아니었다. 교복을 입고 등굣길에 오르지만 내 목적지는 학교가 아니었다. 네가 춘장을 볶고 만두를 튀기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 파묻혔다. 카프카를 읽고, 하루키와 윤대녕과 빌 브라이슨과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났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 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 17p
저자는 사는 동안 수없이 다가오는 지랄맞음을 경험하면서 이게 다 모여 언젠가 축제가 될 거라고 말한다. 비극을 양분으로 단단한 뿌리를 뻗는 한 떨기 꽃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건 장애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사람이면 태어나는 순간부터 온갖 지랄맞음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떤 고뇌도 고생도 아픔도 없는 삶은 없으니까. 그래도 그 모든 지랄맞음이 축제가 될 거라 생각하기란 쉽지 않기에 저자의 단단한 속내가 얼마나 많은 부침과 풍파속에 이루어진 것인가 상상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나는 올해 초봄에 팔꿈치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수술을 받고 힘든 재활을 하면서 ‘와, 도대체 얼마나 잘 풀리려고 이렇게 큰 액땜이 있냐. 기대된다 내 인생!’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그 사고 역시 인생의 지랄맞음이고 그로 인해 언젠가 내 몫의 축제가 벌어진다면 그 보상을 아주 당당하게 받아내야겠다.
인생에 지랄이 찾아오면 언젠가 내게 벌어질 축제를 생각하며 잘 참아낼 수 있는 힘을 이 책을 통해 한 번 더 적립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