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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24. 2017

갈팡질팡하지 않는 멋진 나이

나는 마흔을 잘 치러내고 싶다.


언젠가 큰 형부가 마흔을 앞두고 ‘불혹’을 ‘부록’이라고 쓴 것을 발견하고 일 년 내내 놀린 적이 있다. 그것으로 놀리면 형부는 자꾸 못 들은 척, 안 들리는 척했다. 아마 형부는 장난 삼아 쓴 말일 텐데 물고 늘어진 내가 주접이었다. ‘마흔이란 무거운 나이를 앞둔 형부에게 몹쓸 짓 했구나’라고 반성하는 나 역시 마흔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얼마 전 알았다.


이미 나는 서른다섯이다. 정말로 삼십 대 중반이다. 정확한 삼십 대의 절반치. 이젠 삼십 대 초반이라고 우길 수도 없다. 어디 가서 20대 후반이라고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시기가 왔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다’라고 아무리 떠든다 한들, 노화는 착실하다. 병원을 가면 확실히 알게 된다. 나이에 따라, 필요한 검사와 진료가 다르다. 며칠 전 식도염으로 병원을 찾았을 때 의사가 한 말이 또렷이 떠오른다.


“환자분 20대가 아니잖아요? 20대에는 밤새고, 과로해도 버틸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나이가 그런 나이가 아니죠? 나이가 들었잖아요. 적은 나이가 아니잖아요? 그러니 밤에 잘 자야 하고, 무조건 잘 쉬어야 해요. 또 당연히 20대보다 치료 기간도 길어지는 거예요. 아셨죠?”


처방전을 받았다면 약국 봉투가 한 번 더 강조한다. ‘지금 당신의 나이는 얼마고, 그래서 지금 몸 상태와 나이에 맞게 먹을 약이 이만큼이란 말이야!’라고 번연하게 내 나이를 적어 내민다. 최근 받은 약봉투가 있어 확인해 보니 만 34세로 적혀있다. 이게 며칠 후면 만 35세, 우리 나이로 35세다 이 말이지.




서른다섯은 꿈속의 나이였는데 금세 도달했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 내 주변에는 삼십 대 중반의 여직원이 없었다. 나이가 많아봐야 서른 살 정도였고, 그나마도 결혼을 하거나 임신을 하면 그만두었다. 출산휴가 3개월이 있다 해도 기업 입장에선 그런 휴가를 줘야 하는 직원을 성가시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참 치사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회사에는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에 이르는 여직원이 늘긴 했다. 하지만 그 수가 많지 않았고, 문제는 내 눈에 비친 그녀들의 모습이었다.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의 여직원들은 대부분 결혼한 상태였는데, 그녀들에게서는 여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들은 늘 오후 다섯 시 경이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있는 아이를 데려오는 것, 가족 중의 누군가에게 맡긴 아이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은 회사 복도에서 매일 반복하는 그녀들의 일상이었다. 혹은 갑자기 아이가 아픈 경우, 지금 맡고 있는 업무가 얼마나 중요하든 당장 달려가야 한다는 등의 어려운 일들에 있어 모성을 강요받는 상황까지 컬래버레이션을 이루면 그녀들을 더욱 안달복달하게 만들었다.


그런 상황들이 ‘결혼을 하면 여자는 가정을 중시하기 때문에 회사에 소홀할 것’이라는 편견으로 작용되는 풍경도 가끔 목격하곤 했다. 인사 발표가 있을 때마다 안달복달하던 여직원들의 위치는 늘 제자리였다. 승진을 포기한 듯한 나의 선배들은 그저 묵묵히, 엷은 미소를 띠며 일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당시의 내게 삼십 대 중반 혹은 마흔까지 일하는 것은 큰 난관처럼 다가왔다. 삼십 대의 사회생활은 먼 미래의 일처럼 까마득했지만, 그때가 다가오면 타의든 자의든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막막함이 있었다.


일을 하며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담긴 여러 가지를 표출하는 행기 때문에, 되도록 오래 일하고 싶었다. 그런 고민을 거듭하며 나는 무의식 속에서 마흔까지 일하는 것을 목표인 것처럼 지냈다. 그때는 마흔이 아주 먼 미래처럼 느껴졌던 걸까. 이제 내게 마흔은 4년 하고도 몇 개월쯤 남았을 뿐인데 말이다.


마흔 무렵의 생일케이크라고 한다. 이걸 언제 다 끄지?


다행히 프리랜서를 시작하며 나이에 대한 부담은 다소 줄었다. 그리고 20대에 소망하던 사회생활의 마지노선 ‘마흔’이 5년 남았다. 마흔이 아주 먼 길 일 줄 알았는데 그리 멀지 않다. 마흔까지 5년 남았다고 생각하니 서글퍼지고, 어쩌면 마흔쯤 사회에서 나의 효용가치가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또 이쯤 되니 다시 마음이 간사하게 바뀌어 못해도 쉰 까지는 일하고 싶다.


저녁에 서평을 쓰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속내를 털었다.

“여보, 나 5년 있으면 마흔이야.”

“그런데?”

“나 그때 돼서 일거리 안 들어오고, 늙어서 감 떨어졌다고 원고 청탁도 없고 그러면 어떡하지?”

“여보, 직업이라는 게 꼭 회사를 통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은 글을 쓰지만 그때는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지.”

“다른 직업이라면 가령 어떤 것?”

“음, 생각해봐야겠지만 가게를 차려도 되고?”


흠, 역시 중년의 직업은 가게뿐인가. 하지만 남편도 내 마음의 절반은 모른다. 가게를 차려도 되고, 회사가 아닌 다른 방식의 직업을 가져도 된다. 그렇지만 나는 최대한 오래오래 나를 필요로 하는 남들이 많길 바라는 것이다.




문득 형부를 타박한 ‘불혹’이 생각나 검색해 봤더니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을 뜻하는 말이었다. 와, 5년만 있으면 내가 세상일에 갈팡질팡하지 않고 정확한 판단을 내린단 말이지! 이렇게 멋있는 말인 줄 알았으면 놀리지 말고 축하해 줄걸 그랬다. 형부가 엄청 근사한 나이가 됐다면서.


시간은 수돗물처럼 빠르게 쏟아졌고, 나 역시 불혹이 머지않았다. 지금 상태를 봐서는 마흔이 돼도 갈팡질팡하고 변덕이 더하면 더했지, 얌전해지진 않을 것 같다. 마흔 먹어도 길에서 요구르트 아주머니에게 부끄러워 말 한마디 못 걸고, 마음 편히 배달음식 하나 시켜먹는 강단도 없을 것이다. 마흔이 된다한들 자동으로 어른스럽게 탈피할 거라 기대할 수 없다.


딱 5년이다. 다섯 해가 남았다. 정확히는 4년 더하기 몇 개월쯤인가. 언제나 미숙한 나는 마흔을 잘 치러내고 싶다. 대충 맞이한 마흔에 허둥대고, 사회에서 멀어졌다며 슬퍼하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주어진 5년 동안 나의 색을 확실히 찾아야겠다고 계획한다. 마흔이 돼도 나를 찾는 타인이 많길 바라며, 쉰까지 걱정 없이 일하고 싶다.


그렇게 되려면 타인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돼야 하고, 나만의 색깔이 분명해야 한다. 불혹이 되려면 많이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저 늙어가고, 사회생활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맥없이 살 수 없다. 힘 있게 살고 싶다. 바쁜 발바닥을 갖고 싶다.

잡지에 끼워주는 얄팍한 ‘부록’이 아닌 진짜 ‘불혹’이 되기 위해 5년간 나는 매우 바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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