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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r 27. 2018

드라마가 좋아

시대의 요구에 착실하게 움직이는 작품

매일 밤 10시경, 혹은 8시경 네모진 화면에서 쏟아지는 수천의 작품이 있다. 작품이긴 작품이되, 그것을 작품이라 말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답한다. “그게 무슨 작품이니?”


분명히 작가가 존재하고, 겉보기와 달리 많은 철학이 곳곳에 숨어있는 그것은 바로 ‘드라마’다. 이것이 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소설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의 마음으로 드라마를 본다. 막장이니 어쩌니 해도 드라마는 시대의 요구에 착실하게 움직이는 작품이다.


나와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그래서 신혼살림을 구입할 때 텔레비전을 구입하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 동안 어딘가에 눕거나 앉아 시선을 하나에 고정하는 게 따분하기도 하고,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순간들이 용납되지 않아서다. 그래도 우리는 가끔 재미있다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스트리밍으로 보긴 한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나는 업무 중에 잠시 쉴 때  조금씩 나누어 본다. 텔레비전에서 본 방송을 챙겨보려면 그 시간을 꼬박 앉아있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운 나는 이렇게 원하는 시간에 쪼개 보는 드라마를 선호한다.


드라마에는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고, 현실에서 흔치 않은 외모의 소유자들이 등장한다. 빈부차도 굉장하고,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흔치 않은 지식인이나 착해도 너무 착한 인물들도 나온다. 그들은 어떤 이야기를 전개해가며 각 편당 한 시간 정도, 합치면 스무 시간 정도의 작품을 펼친다.


작품이 펼쳐지는 동안 줄거리 전개에만 목매는 게 아니라 세계 지성의 유명한 멘트나 고전에서 살펴볼 만한 철학이 숨김없이 드러난다.

드라마에서 가장 자주 발견하는 것은 니체의 철학과 프로이트의 이론이다. 니체는 많은 철학자와 대중들에게 영향을 줬는데, 시대를 벗어나 브라운관에도 그 철학을 뿌렸다. 프로이트가 일생을 던져 연구한 심리학 이론이 드라마에 반영되면 흥미롭다 못해 자극적인 장면으로 연출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나면 소설책 한 권을 완독한 후의 기분이 느껴지기도 한다. 다변적인 이야기들이 여러 가지로 얽히는 바람에 우리에게 표현하고 싶은 것이 딱 한 줄로 정의되지 않는 도톰한 책 한 권. 그것을 다 읽고 난 후의 성취감 비슷한 기분이 밀려온다. 실제로 요즘은 드라마 수준이 꽤 높은 편이라 시청 후에 여운이 긴 편이다. 이야기와 인물관계가 복잡하면 해설을 하는 콘텐츠가 생겨나기도 한다.


다만 드라마와 관련해 속상한 점이 두 가지 있는데 막장과 아줌마의 굴레다. 김치로 얼굴을 때린다던가, 기묘한 형태로 외도를 하는 등의 모습이 등장하면 순식간에 그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게 된다. 그게 드라마의 전부인 것처럼 몰아가는 기사들까지 보면 타인이란 언제든 가장 몰인정해지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과 현실이 언제나 평범하고 순탄하기만 할까? 실상 우리는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살고 있다. 길을 걷다가 안면도 없는 사람에게 얻어맞는다. 어린아이들의 너무나 어른스러운 언변에 입이 딱 벌어지기도 하고, 드라마에서나 구경하던 결혼사기가 실제로 벌어진다.


의료기술이 좋아졌다고는 하나 불치병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것을 슬퍼하는 누군가는 언제나 있다. 평생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애완견이 어느 날 갑자기 죽는 일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니 현실과 드라마가 다르다고 주장할 기준이 없다는 거다. 우리가 말하는 막장이란 현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 있는 곳 도처에서 벌어질 법한 일들일뿐이다.

아줌마의 굴레는 또 어떠한가. 외부의 직장에 다니지 않는 전업주부들이 집에서 콩나물 머리나 뜯으며 보는 것이 드라마인 것처럼 표현될 때마다 마음에서 끌끌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인지 탄핵당한 전 대통령이 ‘드라마나 좋아하는 아줌마’로 표현될 때, 드라마라는 작품을 좋아하는 중년의 여성들이 모두 비슷한 부류로 치부될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 할 일 없는 사람, 드라마를 보는 다수의 주부들, 고로 전업주부는 할 일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걱정이 됐다. 드라마를 좋아하면 아줌마, 아줌마라면 좋아하는 게 드라마. 이런 구식의 공식이 ‘아줌마’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는 게 달가울 리 없다.


이런 복잡한 심정을 가진 드라마와 나 사이에 딱 하나 비현실적인 면이 있다. 드라마를 볼 때마다 현실에 흔치 않은 비범한 외모의 배우들이 나오는 덕에 자꾸 짝사랑에 빠진다는 점이다.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을 향해 일방적인 짝사랑을 시작하고, 드라마가 끝나면 일방적으로 끝낸다. 그 짝사랑이 오래가지 않는 이유는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되면 새로운 배우를 향해 다시 사랑이 시작되고 끝나는 반복이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은 배우를 매우 좋아하고 이내 잊어버리지만 미안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것만은 굉장히 비현실적이다. 레토르트 같은 관계, 쉽게 시작하고 쉽게 끝내버려도 탈이 나지 않는 관계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이것이야말로 드라마의 비현실이다.


그럼에도 남편은 나의 가벼운 짝사랑에 질투를 하거나 서운해한다. 언젠가 <사랑의 온도>라는 드라마를 재밌게 볼 때였다. 조용히 선풍기를 닦던 남편이 뭐라 중얼거렸다.

“새 종이 싫어.”

“응?”

“새 종이 싫다고. 새 종이 때문에 나 서운해. 여보가 요즘 새 종이 얘기만 해.”

“무슨 종이?”

“새 종이! 새 종이 싫다고!”

혹시 세종이 말하는 거야?


무슨 소린가 했더니 그 무렵 내가 보던 드라마 속 배우의 이름인 ‘세종’을 말하는 거였다. 연예인이라고는 일절 모르는 남편의 입에서 배우의 이름까지 나온 걸 보면 내가 드라마를 보면서 짝사랑을 얼마나 드러낸 건지.


그래도 걱정할 일은 없다. 드라마가 끝나면 이내 여운을 떨궈내고, 복잡했던 철학만 마음에 새겨 넣고, 짝사랑도 자연스레 종료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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