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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15. 2017

주부의 수행비서

주부의 역할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것은 야채다. 바로 신선한 야채.


지금 살고 있는 신혼집에 이사를 온 것은 12월 중순이었다. 아직도 기억하는 것은 그날 아침 일기예보에서 “오늘 체감온도는 영하 17도로 매서운 강풍이 불 것”이라고 겁을 준 일이다.

‘영하 17도라니, 이를 어쩌지?’라며 편한 운동화에 옷을 꾸역꾸역 껴입었다. 그래도 아마 추울 것이다. 하필 비염도 걸린 상태라 큰 각오를 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짐이 많지 않아 박스로 적당히 싸 둔 것을 지금의 남편과 이삿짐센터 아저씨가 함께 날라줬다. 이삿짐 탑차의 운전석 옆에는 2명의 어른이 살짝 비좁게 앉을 여유가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곳에 붙어 앉아 신혼집으로 넘어왔다. 

차로 15분 거리였기에 금방 도착한 우리 신혼집. 신혼집으로 넘어오며 강을 건너는 육교에서 나무가 머리를 미친 듯 흔들어대는 광경을 바라봤다. 엄청 춥겠군, 하며 도착한 집에서 짐을 내리고 하루 종일 정리를 했다. 그날 저녁은 주문음식을 먹었고, 좀 더 정리를 하다 늦은 밤 맥주와 감자칩을 먹고 잠이 들었다.


느지막이 일어난 것은 일요일. 이사를 왔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시작하는 신혼집에는 아무런 먹을 것이 없다는 것도 실감이 났다. 텅 빈 냉장고는 입을 벌리고 뭘 좀 넣으라며 채근했다. 남편을 깨웠다.

“우리, 뭔가 먹을 것을 사야 하지 않겠어?”

“그러네. 뭘 사야 하지?”

“흠,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음식을 하려면 야채나 양념, 쌀 이런 게 필요하지 않을까?”


남편은 자취를 오래 했으나 요리를 해 본 일이 없고, 나 역시 대부분의 생을 엄마와 살았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결혼한 지금, 이렇게 굶고 있을 수는 없다. 일단 지갑을 챙기고, 남편과 거리로 나섰다. 하루가 지났어도 체감온도는 영하 17도 언저리였다. 코가 얼얼하다 못해 맵게 느껴질 정도로 바람이 매서웠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온 장면. 밭에서 달래와 꽃을 뜯어와 파스타를 만든다.

일단 인근 슈퍼를 찾았다. 아파트 상가 1층엔 다행히 슈퍼가 있었다. 그런데 슈퍼에는 잡다한 물건들은 있었지만 야채가 없었다. 야채가 없는 요리는 상상되지 않았다. 간단한 볶음을 하더라도 파나 양파가 들어가고, 평소 식단에 야채가 없으면 속이 부담스러운 터라 야채는 필수 재료였다.


슈퍼를 나와 근처 마트를 찾아봤다. 다행히 마트에는 다양한 것들이 있었다. 고기, 야채, 공산품 등등 세상에, 세일 코너까지! 그렇지만 싱싱한 야채는 없었다. 

약간 시든 나물, 너무 비싼 유기농 야채, 담긴 지 오래돼 봉투 밑바닥에 허연 물이 고인 야채, 콩류 등이 겨우 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이거라도 사자는 남편의 제의에 간단한 야채와 양념류, 고기 등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한숨이 나왔다.




내가 정리하기로 주부의 삶에는 필수요소가 하나 있는데 바로 신선한 야채와 시장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주부의 역할을 수행하는 시간에 야채는 항상 곁에 있었다. 자매들과 장난처럼 차려먹는 밥상에서 야채는 딱히 대접받지 못했지만, 엄마의 밥상은 달랐다.


콩나물 공장 아저씨의 두껍고 큰 손이 쑥쑥 뽑아낸 콩나물을 간장에 무치거나 여기에 고춧가루를 조금 더해 무친 것, 씁쓸하지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향긋함을 뿜어내는 야채를 썰어 넣은 부침개, 엄마의 빠른 손이 가지런하게 채 썬 무를 아삭하게 무친 무채와 같이 엄마의 손을 거쳐야만 올라오는 야채 반찬들이 있었다. 언니들과 내가 엄마가 없는 시간에 차린 밥상에 그런 게 올라올 리 만무했다.


레토르트에 비해 손길이 많이 필요하고, 신선한 야채를 사 와야 하니 발품도 팔아야 하는데 엄마는 항상 우리에게 야채를 먹였다. 매일 저녁,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올 때면 팔목에 볼을 잔뜩 부풀린 검은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그것을 풀어 무언가로 만들어 상에 올릴 때에야말로 엄마는 여자도, 딸도, 거리의 어느 여자도 아닌 주부로서 역할을 멋지게 완수해낸 것으로 보였다.




그날 저녁 퇴근하는 내 팔목엔 지갑과 파우치가 담긴 토트백이 털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야채를 구입할 만한 곳을 못 찾은 나는 정리가 덜 된 어수선한 집을 향해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회사에서 신혼집으로 처음 가는 날이라 버스편도 어색하고, 추운 길거리에서 정류장도 못 찾아 헤맸다. 겨우 버스를 타고, 안내방송을 놓칠까 봐 마음을 졸이며 정류장에 내렸다. 예상대로 나는 허둥대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고 말았다.


동네 공부하는 셈 치고 걷자며 걷기 시작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처음 보는 사거리에서 떡집과 은행, 화장품 가게를 봤다. 그곳을 지나니 도넛 가게가 보였고, 그 옆으로 어수룩한 조명이 보였다. 우리 집 동, 호수가 몇이더라? 하고 생각하며 걷던 차에 어수룩한 조명 앞에 걸음을 멈췄다.


세상에서 이렇게 찬란한 야채가게가 또 있으려나.

드디어 찾았다, 야채가게! 

조명은 약하고, 간판도 없고, 일찍 문을 닫아버리는 그 야채가게는 탐스러운 과일과 싱싱한 야채가 엄청난 가짓수로 준비돼 있었다. 계란, 두부 등을 함께 팔고 있었다. 

많은 아주머니들이 장바구니를 들고 바쁘게 야채를 담고 있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야채가게가 여기 있었구나! 

기쁜 마음에 나도 녹색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팔에 끼웠다. 어떡하지, 뭘 사지, 하, 설렌다! 뭘 사야 할지도 모르고 양옆을 두리번거리며 양파와 버섯(그땐 버섯 종류와 쓰임도 몰랐으면서), 오이 고추 등을 담아 계산대로 갔다.


구입한 야채를 비닐봉지에 담아 신혼집에 들어섰다. 나보다 먼저 퇴근해 집에 도착해 있던 남편은 나와 비닐봉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그리고는 몇 초간의 침묵이 흐른 후 남편은 눈을 크게 뜨며 “샀어?”라고 물었다. 남편은 야채가게의 부재로 속상해 하던 나를 종일 걱정했다고 한다.


그날 저녁, 우린 따뜻한 찌개에 밥을 먹었다. 추운 날 먹는 찌개라 더욱 맛있었다. 밥을 먹으며 속으로 ‘나도 야채가게가 있어, 나도 신선한 야채를 마음껏 먹을 수 있어!’라며 신나 했다.


어제 저녁 만든 토마토 카레.

2년째 나는 그 야채가게에서 주 1회씩 장을 본다. 요즘 즐겨먹는 야채는 햇감자와 가지, 새송이버섯과 나물 종류. 매일 아침 9시경, 야채를 제공하는 트럭이 오면 야채가게 아저씨가 달려 나가 박스를 운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박스엔 그날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가득 담겨 있고, 기다렸던 나는 다가가 아직 새벽 공기를 씻지 못한 야채들을 가득 담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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