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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12. 2018

이 친구와 정리해야 할까요?

정리할지 고민했다면 정리해도 되는 관계

“이 친구와 정리해야 할까요?”
커뮤니티에서 이런 제목의 글을 보면 심장에 쿵하고 진동을 울린다. 커뮤니티에 자신의 중대한 결정, 개인적인 일을 상담하는 글을 올린다는 건 어쩌면 치부를 밝히는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까.


물론 다수의 의견을 듣는 건 매우 유용하다. 경험상 좋은 스텐냄비 브랜드 추천이라든가, 이사청소 업체를 알아보는 일 등은 혼자보다 다수의 의견을 듣는 게 유익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외의 개인적인 일은 판단이 잘 서지 않는다. 아마 커뮤니티에 의존하는 것보다 인간관계에 관한 판단이 더 어려워서 그러겠구나, 하고 짐작할 뿐이다. 내게도 인간관계는 굉장한 난제기 때문이다.


적지 않게 살았고, 적지 않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내게 인간관계는 어렵다. 또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생각해보면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한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꾸준했다. 나는 ‘왕따’를 초등학교 때 겪었다. 얼마 전 책을 읽으며 생각해봤는데, 왕따를 범죄 항목으로 풀어보면 꽤 많은 죄목이 붙는다. 물론 나는 금전적인 갈취나 신체적 폭력을 당하지 않았지만 내 정신에 남은 폭력은 얼마나 깊었는지 모른다. 그것은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지 않는 지구의 맨틀처럼 태고와 같은 깊이를 파고들었다.


그 이후로 눈에 보이는 따돌림은 없었지만 나를 싫어하는 타인이 느껴지면 사교적인 나로 둔갑하려 애썼다. 중학교 시절, 친한 친구들과 모여 대화하던 중 친구 몇이 이런 말을 했다.

“왕따도 한 번씩 당해봐야 성격이 좋아져.”

“맞아, 왕따 안 당해본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나는 다른 친구들을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무렵 반에서는 한 명씩 묘한 따돌림의 대상이 있었다.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늘은 누군가 소외감을 느끼고 며칠 후엔 다른 누군가에게 소외감이 옮아가는 식이었다.


그 당시엔 그저 다 같이 공격할 대상이 필요했고, 그렇게 소속감을 쌓아간 게 아닌가 싶다. 나 역시 납득할 수 없는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방어력을 키웠을지 모른다. 다시는 소외당하지 않기 위한 방어력 말이다.


아마 그 무렵부터의 나는 친구 사귀는 게 쉬운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툭툭 말을 잘 걸고, 웃기려고 애쓰며, 소소한 선물도 곧잘 하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를 깊이 사귀지 않은 사람들은 내게 친절하고 사교적이라는 섣부른 평가를 남기곤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곪는 중이었다. 나는 친구들의 가시 돋친 말을 잊기 힘들었다. 장난스레 외모를 놀리는 말에 억지로 웃어놓고, 집에 돌아오면 꺼이꺼이 울었다. 내게 손해를 입힌 친구에게는 언젠가 기회를 엿봐 똑같은 손해를 입히고자 마음을 먹은 날도 있다. 나는 결코 친절한 부류가 아니었다. 그저 사교적이자 인간관계에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잘 만들어진 케이스에 나를 담고 다닐 뿐이었다.


상처받는 시간은 나이가 먹어도 같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 어른스러운 인간관계가 가능할 줄 알았다. 웬걸, 대학교도 다를 바가 없었다. 무리를 이루고 다니고, 누군가를 공격하고, 서로를 잘 모르기에 무의식 속에 간을 보며, 공격과 방어를 서슴지 않는 것은 성인이 돼도 마찬가지였다.


하긴 그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고등학생이 한 살 더 먹었다고 굉장한 가치관의 성장이 이루어질 리가 없는데, 대학생이 되면 달라질 거란 기대에만 부풀어 살았던 것이다.

학교라는 굴레가 문제일까 싶어 하루빨리 사회로 나오고 싶었다. 자신을 책임지는 데 단련돼야 할 사회인이라면 그런 인간관계는 맺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오히려 더 맹수 같았다. 속이고 속이는 사람이 허다했고, 학창 시절에 단련이 됐는지 타인을 바보로 만드는 게 능숙해졌다. 사회에서도 인간관계는 공격과 방어의 연속이었다.


공격과 방어가 반복되는 여정에서 친구를 친구답게 대하지 못해 소원해진 관계, 사람 간의 소개를 신중히 하지 못해 멀어진 관계들이 있었다. 그들에는 인간관계에 능숙한 사람의 케이스를 벗고, 실상은 두루두루 좋은 것을 도무지 참기 힘들다는 마음을 보여줄 것을 그랬다고 후회의 물에 잠긴다.


진실로 걱정해준 친구에게 되레 모진 공격을 쏟아부어 나는 열등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했던 시절, 서로 맞지 않는 친구들을 소개하며 사교적인 이미지를 두껍게 만들려고 한 어리석음. 부끄러운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각인되는 바람에 이제야 나는 몹시 괴롭다.




어느 날, 군더더기 같은 관계들을 정리하고 싶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다. 아마 어리석게 친구를 사귀는 나를 비춰봤기 때문일 거다. 싫은 데 싫다고 말 못 하고, 듣기 싫은 것을 억지로 들어주며, 미래를 알 수 없는 ‘인맥’을 쌓고 있는 나는 미숙아였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하고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의 약함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다.


약한 채로 성장한 내가 얼마나 비뚜름했으면, 그토록 싫어하는 ‘좋은 게 좋은 것이다’라는 말을 스스로 실천하고 있었다. 결국 결혼을 계기로 삼아 지난했던 사교의 끈을 잘랐다.


전화번호부 가득한 수백 개의 번호 중 내가 외고 싶고, 알고 싶은 번호만을 남기고 정리를 했다. 이윽고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그럼에도 사교의 끈은 엄청 질겼다. 질긴 인맥들은 알음알음 내 번호를 알아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부끄러운 전화를 걸거나, SNS에 반갑지 않은 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이 친구와 정리해야 할까요?’라는 상담글을 읽던 나는 댓글을 적어주고 싶었다. 정리해야 할지 고민했다면 정리해도 되는 관계라고 말이다.


글에 드러난 상대방. 즉 내게 얻어낼 것만 궁리하는 친구, 자신의 편의는 중요하면서 상대의 편의는 아랑곳하지 않는 그 친구, 가진 것을 과시하고 싶어 병적으로 SNS에 소비를 드러내는 친구를 정리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다만 오랜 시간을 공유한 친구였다면 그 정리가 쉽게 풀릴 거라 기대하지 않길 바랐다.


나이를 조금씩 먹어가면서 오랜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미래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니 의무감을 버리기로 한다. 그동안 간직해온 인간관계에 고단 해지는 대신 내일 더 잘 살기 위해, 오늘 남은 끈 몇 개를 자르기로 한다.


그리고 ‘내일 더 잘 살아내야지’라고 마음먹는다. 다시 반복되는 미련한 인간관계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지난 어제보다 내일 잘 사는 게 쉽다는 걸 되새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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