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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29. 2017

닮은듯 다른 두 여자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하는 관계

“뭐해?”

달가울 수도 달갑지 않을 수도 있는 말이다. 뭐해, 라니. 말 몇 조각 더 붙여서 ‘지금 바쁘니?’, ‘어떻게 지내니?’ 정도로 말해도 좋으련만. 불쑥 귀로 들어오는 뭐해, 는 삼십 년 넘게 들어도 참 별로다.


“엄마, 그 ‘뭐해’ 말고 다른 말로 시작할 수는 없어?”

“니 엄마가 이런데 뭐! 뭐, 어쩌라고?”


이 말이 글자로 옮기니 약간 시비조로 보일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통화내용이다. 엄마는 전화를 걸면 상냥하지 않은, 그것도 남자의 어투를 흉내 내며 꼭 저렇게 ‘뭐해’를 던진다. 이럴 바엔 차라리 구남친의 ‘자니?’를 듣는 편이 낫겠다.




엄마는 어떤 소소한 용건이 생기면 저렇게 “뭐해?”를 묻고, 급하고 중요한 용건이 있으면 내 이름을 부른다.

뭐해,를 묻는 날은 주로 고리타분한 잔소리를 바탕으로 작은 걱정거리를 묻는다. 아무래도 세대차이가 나다 보니 엄마는 내게 여권이 아주 낮은 시절의 여성성을 강조하신다. 바깥일을 하면서도 집안일은 내가 도맡아 하라는 것과 남편의 기를 살려줘야 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결혼 직후에는 출산에 대한 강요도 더러 있었는데, 다행히 큰언니가 아이를 낳지 않고 잘 살고 있어서인지 이 강요는 잠잠해졌다.


반면 급하고 중요한 용건이 있는 날은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태어날 무렵 아빠는 해외에 있었다. 외할머니께 언니들을 맡기고 혼자 조산원을 찾아 나를 낳은 엄마는 내 이름도 혼자 지었다.


우리 친가의 아들은 이름에 ‘영’ 자를 돌렸고, 딸은 ‘연’ 자를 돌림자로 썼다. 그런데 가장 막내로 태어난 나는 이름에 ‘연’이 없다. 워낙 딸이 많은 친가라 돌림자인 ‘연’ 자에 더 이상 붙일 글자가 없었다고 한다. ‘연’이 들어가는 웬만한 이름이 친가에 다 있지만, 그래도 진보적이고 세련된 분위기의 이름은 없다. 그 시대에 그런 이름은 생각할 수도 없었단다.


그래도 엄마는 돌림자 하나 없이 짓기가 내키지 않아 큰언니의 이름 끝자를 붙여 내 이름을 지었다. 그렇게 지은 내 이름을 부를 때 엄마는 차분해진다. 내 이름을 부르고 말하는 용건은 엄마에게는 급하고 중요하지만 막상 들어보면 별 일이 아니다. 주로 엄마를 보러 오라거나, 필요한 화장품이 있다거나, 몇 해 전 암에 걸린 할머니의 소식이다. 그런 이야기에 따뜻하게 엄마를 위로하는 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종종 그런 내용의 전화를 거신다.


“이번엔 할머니가 정말 안 좋으신 것 같아. 암환자가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얼마 남지 않은 거라는데.”

걱정하지 마. 할머니 오래 사실 거야.”

“아냐, 오늘 보고 왔는데 안색이 너무 안 좋았어.”

“여기서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할머니 살아계시는 동안 즐겁게 지내는 게 중요한 거야. 할머니랑 더 좋은 시간 보내면 되지.”

“너는 왜 말을 해도 꼭 그렇게 싸가지 없게 하니?”

“아니, 내가 싸가지 없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엄마도 이런 얘기 계속하잖아?”

“나쁜 년. 너 내가 암 걸리고 아파도 그럴 거야?”

“엄마 혹시 속이 허하거나 배고픈 거 아냐? 배고파서 이러는 거지? 뭐 따뜻한 거 드시고 주무셔. 응?”


대체로 이런 대화를 나눈 뒤 엄마가 씩씩대며 전화를 끊는 것이 반복된다. 그런데도 엄마는 내게 먼저 전화를 곧잘 하신다. 다툰 뒤에 마음을 풀지 못하고 돌아서 있는 내게 먼저 전화하는 건 항상 엄마 쪽이다. ‘절대 머리 숙이지 않는 고집스러운 년’ 엄마가 내게 남기는 한 줄 평이다.


그런데 사실 그 ‘고집스러운 년’은 자매 중 엄마를 가장 많이 닮았다. 얼굴과 키, 덧니의 위치까지 닮았다. 슬프게도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는 나를 보면 엄마의 이름을 부르셨다. 외할아버지가 가장 예뻐했다는 큰 딸은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외할아버지 곁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 큰 딸의 얼굴을 빼다 박은 나를 보며 외할아버지는 가끔 우셨다.


엄마와 나의 꽃 취향은 같다.


엄마는 일찍 결혼하는 바람에 학교를 제대로 마치지 못했다. 보통의 어른들이 자신의 과거는 멋지게 부풀려 하늘이 내려준 운명의 대서사시 말하듯 나의 엄마도 그러하다. 엄마가 스스로에게 작성한 한 줄 평은 ‘공부를 계속했으면 판검사가 됐을 사람’이다. 엄마 머릿속에 판검사는 가장 높은 사람, 훌륭한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게 유독 ‘사’ 자 들어가는 직업을 권유했다. 가장 많이 권유한 것은 ‘교사’였다. 누굴 가르칠 주제가 못 되는 내게 줄기차게 선생님이 길 권했다. 혹은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충 시집이나 가라고도 했다. 내가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밥 빌어먹기 힘든 글쟁이가 돼서 무엇에 써먹느냐’고 호통을 쳤다.


그랬던 엄마지만 어느 날엔가 술을 한 잔 하고 와서는 “네 재능을 인정하고 키워주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고백하신 적이 있다. 재수생활할 때는 “공부하랄 때는 안 하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주 못 됐다”라고 성을 내시더니, 수능 전날엔 영험하다는 절을 찾아가 내가 꼭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며 천 배를 하고는 다음날까지 무릎이 아파 못 일어나셨다.




어투는 투박하지만 엄마가 상냥했던 기억이 아직 많기에 종종 무거운 엄마의 부탁을 거절하기 어렵다. 딸 셋에게 공평하게 잘해주기에 버거웠을 것이고, 경제능력이 한참 떨어지는 남편 대신 돈을 벌어야 했던 엄마는 자식들이 무엇을 바라는지 헤아릴 시간이 없었다. 내가 시험을 잘 보고 받아온 성적표를 엄마는 읽어보지 않았고, 배우고 싶은 게 있어도 털어놓을 시간조차 없을 만큼 엄마는 돈벌이가 바빴다. 내가 이유 없이 아빠에게 매를 맞아도 엄마는 그것을 막아줄 힘이 없었다.


그럼에도 장사를 나가지 않는 겨울철에는 집에서 뜨개질로 온 가족의 옷을 만들고, 함께 빵을 먹으면 내가 잘 먹는 부분만 잘라 입에 넣어주고 남은 것을 드시던 엄마의 손길을 기억한다. 나의 대학 졸업식 날 학사모를 쓰고 좋아하시던 해사한 얼굴이 남아있다. 백화점 세일 코너에서 내 구두를 한 켤레 사 와서는 신겨보고 손뼉 치며 좋아하던 앳된 웃음도 기억한다.


그래서 모녀지간을 표현하는 말 중에 ‘애증’이란 말이 흔한 모양이다. 사랑함과 동시에 미워하는 관계. 부모 자식 간에 당연한 사랑이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환경에 처하는 덧셈과 뺄셈의 연속. 나는 엄마와의 관계에 애증을 깊이 느낀다. 엄마를 아끼고, 미워하고, 미워해서 슬프고, 외면해서 아프다가 또 따뜻하게 지내는 반복의 굴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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