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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25. 2017

알고 보면 성근 사람

빡빡한 사람도 성글게 풀릴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인간관계도 미니멀 라이프다”라고 말하고 다닌다. 이건 정말 우스갯소리지만 일말의 진심이 담긴 말이기도 하다. 서로 웃으며 지낼 수 없는 인간관계라면 억지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다짐은 어지간해선 꺾이지 않는다.


얼마 전까지는 웃으며 지낼 수 없거나 생각이 통하지 않아도 오래 지속해온 인간관계는 보전하자는 마음이었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느슨해졌다. 너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예의상 웃어주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모른다.


이를테면 ‘여자는 당연히 요리를 잘 해야 하고, 반찬 가짓수가 몇 개 이상은 돼야 한다.’고 우기는 남자 사람 친구에게 웃으며 동의해줄 수 없었다. 가족 구성원이든 부부든 누군가 전업주부의 역할을 맡고 있다면 당연히 요리를 할 수 있지만 반찬 가짓수가 몇 개 이상으로 정해져 있는 건 어쩐지 기분 상한다.


게다가 요리를 당연히 여자가 해야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저런 꽉 막힌 주장을 당연하듯 말할 정도면 이미 논리적으로 설득하긴 글렀다. 이런 대화에서 나는 목이 자주 막힌다. 카스텔라 한 개를 꿀꺽, 했는데 음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상황이랄까. 목구멍이 빡빡하고 가슴팍이 뻐근해진다.


또 어떤 친구는 ‘남자는 기가 죽으면 안 되므로 최대한 남편에게 맞춰주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털어놓았다. 나는 차마 친구에게 잘 하고 있다며 응원할 수 없었다. 남자든 여자든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슬픈 일이 있으면 기가 죽고, 좋은 일이 있으면 기가 사는 게 사람 아닌가! 무적의 인조인간이라면 모를까, 사람이라면 당연히 기가 죽을 수 있다.


게다가 남자라서 기가 죽으면 안 된다니!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는 여자 사람 친구에게 적지 않게 놀랐다. 아마 친구는 내게 “그래, 너 참 잘 하고 있다!”는 동조를 원한 모양이었다. 대답을 못 하는 내 얼굴을 구석구석 쳐다보는데 또 목구멍에 빡빡함이 느껴졌다. 이 말할 수 없는 답답함, 피할 수 없는 고통! 참 빡빡하다.




내 도량이 고작 이 정도라 친구들이 서운해 한들 그들의 논조에 겉으로 동조하며 좋은 말을 건네기가 도무지 어렵다. 동의할 수 없으니 표정 관리도 안 된다. 다만 생각이 통하지는 않더라도 그 상대가 나쁘다고 욕하거나 원망하진 않는다.


오래전 만나 지금까지 긴 시간을 살면서 각자 가치관이 바뀔 수 있으니까 말이다. 나무는 자랄수록 가지가 멀리 뻗어나가고 다채로운 방향으로 향하는데,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가까운 곳에 머물렀으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 여기 와있을 뿐. 그래도 이런 인간관계는 상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전제한다. 즐거운 추억을 공유하고 서로를 아끼던 시절이 이해의 버팀목이 된다.


최근 곤혹스러웠던 빡빡한 관계도 있었다. 내가 맡아 일하고 있는 한 업체의 담당자였는데, 그는 내가 하는 업무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회사의 대표가 관련 업무를 나누어 주거나 기획안을 짜보라고 지시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좋은 동료가 될 수 있고, 어쩌면 나를 긴장하게 만들 인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과 동시에 마음이 상하고 말았다. ‘~님’이라고 존칭을 써서 호칭하는 내게 담당자는 ‘~씨’라고 불렀다. 개인마다 호칭을 쓰는 데 차이는 있지만, 존칭을 썼던 상대에게 ‘~씨’를 붙여 말하는 그 담당자에게서 작은 흠집을 얻고 말았다.


어느 날엔 그 담당자로부터 메신저가 왔다. 처음 나누는 메신저였는데 내 기획안을 보고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네, 어떤 말씀이신가요?”

“이 기획안 본인이 쓴 것 맞아요?”

“네, 제가 쓴 거죠. 예전 기획안은 보셨나요?”

“봤어요.”

“그럼 제가 썼다는 것을 아실 텐데요. 기재해 둔 바와 같이 추가로 기획한 것은 다른 색상으로 표시했습니다만.”


이후 아무 대답이 없다. ‘할 말’이 있다고 했던 담당자의 ‘할 말’을 기다리던 나는 조용한 메신저에 먼저 질문했다.

“기획안에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까 할 말이 있으시다고 했는데.”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요.”


담당자의 연락은 할 말이라기보다 의심을 품은 용건이었다. 할 말이 있다기에 새로운 아이디어나 추가 기획이 있을까 기대했던 내 들뜬 마음에서 ‘폭삭’ 소리가 들렸다. 고구마를 한 움큼 삼키고 우유를 다급히 찾을 때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이라고 해도 발톱 세워가며 원망하고 각을 세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조직생활이라는 게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여러 마리를 떨어뜨려놓고 ‘어디 한 번 싸워서 공을 세워봐!’라며 부추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서 힘껏 공격하는 사이 근거도 타당성도 놓치지만, 사실 맥락과 배경을 살펴보면 결코 악인도 아마추어도 아니다.  


만약 앞뒤 없이 등 돌린 채 자기 속의 말만 하는 사람이라면 방법이 없다. 따뜻한 물 한 방울 흐를 틈이 없이 완강한 상태일 뿐이다. 그 빡빡한 틈에 타인의 배려든 기회든 끼어들 리 없다.


그래서 빡빡한 사람은 외롭다. 자신은 잘 하고 있고 아무 문제없는데 주변 사람들은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고 믿는다. 갖고 싶은 것도, 쟁취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럴수록 빡빡하고 빈틈없이 몸집을 불린다. 아집으로 채워진 거구에 다가가고 싶은 사람은 없다.


다행히 그 담당자는 무작정 등 돌린 사람이 아니었다. 내 친구들의 고집스러운 이야기에서 느꼈듯, 그저 다채로운 방향으로 살아가느라 나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우연한 기회에 술자리가 있었고, 잔을 나누며 이야기를 해보니 진중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날 나는 작은 오해 뒤에 가려진 그 담당자의 따뜻한 면모에 몹시 기뻤고, 이후 업무도 수월하게 흘러갔다.


빡빡한 사람도 이토록 성글게 풀릴 수 있다. 아무것도 관통하지 않을 정도로 빡빡한 사람보다 적당히 성근 사람이 편안해서 좋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고 의문이 드는 빡빡한 사람들도 사실 어느 한 구석 성글게 풀려버릴 여분이 있다. 언제라도 별로인 빡빡한 사람, 사실은 알고 보면 포근하고 성근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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