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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23. 2018

심의 불가, 눈치 불가

부정적인 노래는 허락하지 않는 유감스러운 시대

참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 몇 년 전 우연히 그 가수의 데뷔 무대에 있었는데, 건반을 치며 지르는 목소리에 반해버린 후 줄곧 좋아해 왔다. 얼마나 좋으면 군 복무도 기다렸다. 물론 그 가수는 내가 숨 쉬는 것도 모른다. 내가 군대 기다린 것도 알게 뭐람. 그 가수가 누구냐면 정준일이다. 이미 좋아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준일찡♡ (사진 출처 : 엠와이뮤직 블로그 http://www.mymusicent.co.kr/)


얼마 전 정준일의 EP 음반이 나오는 날이었고, 오후 6시를 기다려 새 음원을 들었다. 가사 없이 반주로 시작되는 <유월>을 귀에 흘려 넣었다. 음악을 들으며 포털 사이트를 검색하던 중 이상한 기사를 봤다. 새 음반 중 타이틀곡 <say yes> 공중파 방송사의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방송사 심의가 있다는 것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손길을 이토록 가까이 느낀 게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지금 2018년이 맞긴 하지? 이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기사를 잘 살펴봤다. 예전에도 그의 음반에서 일부가 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적이 있긴 했는데, 이번엔 심의 불가 판정 소식이 왜 이리 불편하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아득한 옛날, 심의 불가를 처음 경험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유감>에서였다. 굉장히 기다렸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새 음반에서 한 곡이 연주곡으로 실렸다. 가사가 없으니 직접 전해지는 바는 없으나 뭔가 흥미진진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시대유감>의 가사는 서태지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지켜본 뒤 느낀 것을 토대로 썼다고 한다. 그 내용에 대해 한국공연윤리위원회는 사전심의에서 가사가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리고 청소년들을 선동한다며 불가 판정을 내리고 가사를 수정하라고 요구했다. 수정을 요구한 가사는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등이었다.


수정할 바에야 가사를 싣지 않겠다며 연주곡만 실었던 그 곡은 몇 년이 지나 세상에 등장하긴 했지만, 당시 십 대였던 내가 보기에 이 일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노래는 허락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세상인가.


게다가 아티스트의 창작물을 평가하고 세상에 내보낼지 말아야 할지 판단하는 주체들, 생각만 해도 무서운 존재다. 그들이 창작물을 평가하는 모습을 자주 상상하곤 했다. 검고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 빛이 떨어지고 있다. 그곳에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음악과 영상이 쉼 없이 등장하고, 검은 망토를 걸친 이들이 안광을 빛내며 YES와 NO를 언급하는 상상이었다.


현실을 부정적으로 그리면 안 된다는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먼 훗날 가수나 시인이 됐을 경우 즐겁고 희망적인 노래만 해야 하는 것이다. 어두운 감성은 꽁꽁 숨겨야 하고, 희망 가득한 마음만 노래해야 하는 세상. 웃음 가득한 얼굴로 밝은 노래만 부르는 기계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한편으로는 어두운 감성의 소유자들은 소외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우울하고 아픈데, 왜 세상은 밝고 즐겁다고만 할까?’ 이런 생각이 들고도 남는다.


<시대유감>을 방송에서 못 부르게 만든 그 시절의 어른들은 무엇이 불편하고 무서웠을까? 그들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면 단죄라도 받아야 하는 사람이었을까?




그 이후로 심의제도는 다소 느슨해진 것으로 알고 있다. 심의를 통과한 게 신기할 정도로 야하고 성 상품화의 내용이 담긴 노래가 버젓이 등장하는 걸 지켜보며 이제 우리도 꽤 자유로워졌다고 느꼈다.


그랬던 차에 심의 불가 소식을 들으니 어찌나 껄끄러운지 모른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시대유감>의 사태를 지켜보던 시절 나는 십 대였고, 지금은 이십 년이라는 엄청난 세월이 흘렀다는 점. 그리고 지금의 나는 음악은 아니지만 소소하게나마 글을 쓰며 표현의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선풍적인 작가는 아니지만 나 역시 창작물을 만드는 사람으로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권리인지 알게 다. 비록 내게 사전심의는 없지만 ‘눈치’라는 게 있다. 에세이를 쓴다는 게 그런 일이다. 내가 쓰는 글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하진 않은지, 내 사람들이 싫은 감정을 느끼지 않는지 자꾸 눈치를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고 이런저런 단어를 잘라가다 보면 표현의 자유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가치인지 실감하게 된다. 매일 실감한다. 눈치 보며 쓴 글은 내 글이 아니다. 내 주위의 압력이 나 대신 쓴 글이다.


마음껏 떠들고 타인을 욕되게 하라는 게 아니다. 어느 정도의 ‘선’을 지킬 만큼은 창작하는 이들의 몫이고 교양이다. 모든 창작물은 소비하는 사람의 기분과 성향, 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날 선 평가를 하려 든다면 세상 모든 창작물무기가 되고 만다. 창작물의 세상은 전쟁터가 된다.


정준일은 심의 불가 판정 소식에 가사 수정은 없다고 의견을 전했다. 심의 불가 판정을 내린 방송사에서는 가사에 부적절한 표현이 있어서라고 이유를 밝혔다. ‘부적절한 표현’은 냉정하게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는 적절한 범위에서만 행하라’는 압력이다.

내가 좋아하는 plastic이 있는 정준일의 underwater 음반 표지(사진 출처 : 엠와이뮤직 블로그 http://www.mymusicent.co.kr/)


과거에도 심의 불가 판정을 받았던 정준일의 곡 중 <PLASTIC>이 있다. 내가 매우 좋아하는 곡이다. 방송사에서 염세적이라며 불가 판정을 내렸던 이 곡은 그들의 예상과 달리 내게는 굉장한 위로가 됐고, 자신이 몹시 싫어지는 날 해소의 도구다. 염세적인 세계로 날 이끌지 않고, 오히려 어두운 나락에 빠진 내게 손을 내미는 음악이었다.


이 곡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 있다. ‘익숙한 방안에 너만 없는 풍경이 어색할 때, 아침에 일어나 무심코 너의 이름을 불렀을 때, 홀로 잠들던 밤 이유 없이 눈물이 쏟아질 때, 아무리 울어도 날 꼭 안아주던 너는 없는데.’ 공감이 가는 우울이었다. 이 곡을 들으며 ‘나만 아픈 게 아니구나. 나만 혼자였던 게 아니구나.’하며 깊은 위안을 받았다.


염세적이든 우울하든, 창작물은 소비하는 사람에 따라 몫이 달라진다. 사람마다 인생을 걸고 소중히 여기는 아티스트, 음악, 책 등이 있는데 심의제도는 그런 기회를 일찌감치 박탈하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 껄끄럽다.


그럼에도 정준일은 멋진 음악을 계속할 것이고, 나를 포함한 팬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고 꾸준히 그의 음악을 들을 것이다. 수정하지 않는다는 소식은 바라던 바였다. 나도 오늘은 하루 종일 그의 음악을 들으며 자유로운 글쓰기에 파묻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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