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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31. 2018

외숙모의 토스트

내가 올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두 번째 엄마

작년부터 동네에서 작은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네다섯 명이 모여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모임이다. 벌써 여러 권의 책을 읽었는데, 모임 초반에 따스한 에세이를 함께 읽은 적 있다.


소중한 사람들과의 기억을 담은 에세이였는데, 이 책을 읽고 삶의 소중한 가치를 알려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씩 생각해 오는 것까지 독서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물이었다.


책은 재밌게 읽었는데 ‘삶의 소중한 가치를 알려준 사람’ 떠올리는 게 쉽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의 보컬 언니? 이건 너무 유치하다. 내 남편? 이건 너무 남편 자랑 같다. 엄마? 아니다. 엄마가 요즘 나한테 미운 짓을 많이 하고 계시니 패스.


커피를 마시며 한참 생각하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하얗고 갸름한 얼굴, 쌍꺼풀이 있는 큰 눈, 조금 통통한 팔다리가 귀여운 나의 큰 외숙모였다. 나이가 50세를 훌쩍 넘은 외숙모지만, 단 한 번도 뽀글이 파마를 하지 않고 긴 머리를 묶어 청순함을 유지하는 나의 숙모.


우리 외숙모는 나처럼 막내딸인데, 꽤 부잣집에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외숙모는 시집와서도 늘 행동이 소녀스러웠고, 소곤소곤하는 목소리가 예뻤다.


우리 외가의 장남에게 시집오는 바람에 온갖 궂은일을 맡아하고,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를 직접 돌보고, 명절이 아니라도 틈틈이 찾아오는 수많은 손님을 치러가며 긴 세월을 보낸 외숙모는 늙긴 늙되 소녀로 늙었다. 여전히 초콜릿을 좋아하고, 말 한마디도 수줍고 예쁘게 건네신다.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 위태로웠던 우리 가족은 몇 달간 찢어져 살아야 했다. 가족 중 학교를 다니는 건 나뿐이라 외가에서 3개월을 살아야 했다. 외가 식구들은 항상 따뜻했지만, 나는 얹혀사는 거란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복잡한 사정이 있었지만, 나는 어쩌다 잘못된 가정에 태어나 외가에 숨어 살아야 하는지 한탄스러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손녀 한 명이 와서 몇 달 지낸다고 문제가 없었지만 정작 손이 많이 가는 것은 외숙모였을 것이다. 삼촌과 외숙모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정신없이 키우는 외숙모가 하필 시누의 딸인 나까지 맡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외숙모는 내게 한없이 자애로웠다. 가정환경에 대한 불만과 사춘기의 번민이 뒤섞인 내가 요란하게 화장을 하고 놀다 온 날이면 할머니가 호되게 야단을 치셨다. 할아버지는 방에서 한숨을 쉬셨고, 삼촌은 할머니를 말렸다.


가족은 엉망이고, 나도 엉망이고, 학교 성적은 더 엉망이었다. 할머니가 야단을 치시면 외숙모는 본인이 타이르겠다며 내 손을 잡고 별채로 갔다. 별채에 앉아도 외숙모는 나를 타이르거나 훈육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 둘을 키우는 아줌마가 다 됐으면서도 외숙모는 언제나 소녀 같은 목소리로 “상미야, 괜찮아. 그럴 수도 있는 거야.”라며 쓰다듬기만 했다.


그 무렵은 나의 어수룩한 비행이 끝장을 달리던 시기였다. 나를 관리하던 엄마와 언니들이 곁에 없었고, 이미 성적은 회복할 수 없을 만큼 바닥을 쳤다. 나는 친구들과 독서실 한 달 치를 끊었다. 물론 우리 중에 누구도 공부할 생각으로 독서실을 등록한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주말이면 집에 공부한다는 핑계를 대고 나와 독서실에 모였다. 독서실 책상 위칸의 사물함에는 화장품, 옷, 구두 등이 들어있었다. 우리는 옷을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고 놀았다.


공부 외에 나머지는 다 재미있었던 시절, 우리는 열심히 깔깔거리고 놀았다. 그리고 다시 독서실에 돌아가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외가로 돌아갔다. 내가 공부를 오래 하고 돌아온 줄 아는 외할머니는 따라 들어오셔서 용돈을 쥐어주셨다.


그다음 주말이 됐고, 나는 또 독서실에 간다며 준비를 했다. 한동안 외숙모가 부산스럽더니 내게 무언가를 손에 들려줬다. 토스트였다. 그것도 한 두 개의 토스트가 아니라 10개의 토스트였다. 나는 종이가방을 열고 토스트를 본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외숙모, 토스트가 왜 이렇게 많아요?”

“친구들하고 나눠먹어. 배고프면 공부 안되지. 라면 같은 거 사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저녁에 외숙모가 더 맛있는 거 해줄게!”

그날 외가를 나와 독서실로 가는 내내 뒤통수가 어찌나 따끔거렸는지 모른다. 버스를 탔는데, 내리쬐는 햇빛이 나만 쪼아대는 것 같았다. 독서실에 도착해 토스트를 펼쳐두니 친구들이 웃겨서 난리가 났다. 어쨌거나 싸주신 토스트는 말끔하게 나눠먹고, 우린 화장을 하고, 놀러 나갔다. 놀러 나가봐야 특별히 할 것도 없었다. 하릴없이 거리를 걷거나, 사지도 않을 옷을 구경하고, 공원에 가서 수다나 떨면서 거리에 시간을 흘렸다. 토스트 덕에 배는 불렀다.


그리고 그다음 주말에 또다시 외숙모는 토스트 10개를 만드셨다. 너무 많다고, 괜찮다고 말했는데도 똑같은 말씀을 하시며 손에 토스트 봉투를 쥐어주셨다. 그날도 나와 친구들은 토스트를 먹었다. 토스트가 참 단단하다고 느껴졌다. 친구들과 거리를 걷는 내내 토스트가 목구멍에 매달려 철봉을 탔다.


다시 다음 주말이 됐을 때 나는 또 토스트 봉투를 받았다. 식용유를 넉넉히 두르고 구운 식빵 사이에 계란 프라이와 설탕과 케첩이 얹어진 외숙모의 토스트는 고소하고 맛있었다. 특별한 재료가 들어있지 않았지만, 세상에서 처음 먹어보는 진귀한 음식처럼 떨어지는 빵가루가 아쉬울 정도였다. 그날도 나는 친구들과 토스트를 나눠먹었다. 그리고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은 다음 전날부터 생각한 것을 말했다.

“야. 나 오늘 안 나갈래.”


그때 멍해진 친구들의 얼굴은 마치 정지영상과 같았다. 같이 나가자고 몇 번을 조르는 친구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나는 휑한 독서실에 남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 이후 처음으로 자의를 갖고 공부를 했다. 당연히 기억나는 게 없고, 수업시간에 잠만 자고 제대로 배운 게 없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몰랐지만 일단 교과서라도 읽어가며 공부를 시작했다.




외숙모의 토스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자리에 앉혔다. 어떤 강요 없이 자리에 앉아 공부를 시작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다. 외숙모는 내게 한 번도 공부를 강요하지 않으셨고, 무엇을 하라거나, 이것을 하면 안 된다며 금지하지 않으셨다.


그저 주말에 독서실 핑계를 대는 조카의 간식을 싸주고, 잘못을 저질러도 기가 죽을까 봐 혼내지도 못하고, 괜찮다는 말로 보호막을 쳐주셨다. 나는 그것이 부모의 사랑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부모님의 문제로 늘 부족하고 아프게 살았던 나는 처음으로 온전한 부모와 사는 것은 이런 행복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나는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는데, 기초가 엉망이어서 결국 재수를 했다. 혼자 독학으로 재수를 하고 대학에 입학한 내게 유일하게 입학 선물을 사준 사람도 외숙모였다. 외숙모는 대학생이니 좋은 음악 많이 들으라며 하얗고 근사하게 생긴 오디오세트를 사주셨다.


나는 그 오디오로 매일 음악을 들었고,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으며 영어회화 연습을 했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밤이면 라디오를 들으며 리포트를 쓰곤 했다. 오디오를 틀면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가족이 있다는 확신이 들곤 했다. 내게는 무서운 아빠와 힘든 엄마가 있고, 내가 올바르게 걸을 수 있도록 도와준 두 번째 엄마가 있다는 확신.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인지 예전처럼 외숙모에게 살갑게 대하기가 어려워진다. 스스로 못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고마운 분께 찾아가는 횟수가 줄어든다. 매번 ‘이번 명절에는, 이번 어버이날에는’ 보다 다정하게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못나게 나이만 먹고 있다.


외숙모의 토스트를 먹고 자란 덕에 나는 이만큼이라도 자랄 수 있었다고 늘 생각한다. 나의 감사한 숙모, 오래도록 행복한 소녀로 계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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