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온 뒤 맑음
직업이 없다고 규정되던 20대 중반의 어느 날,
나는 평생 모아둔 모든 돈을 가지고 어학연수를 떠났다.
도망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많은 합리화를 덧붙이며..
- 나는 이제 취업을 해야 하니까 어학연수를 해야 하지 않을까?
- 요즘 다들 어학연수는 기본으로 다녀온데, 아직 해외 안 가본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야
- 취업하면 열심히 돈 벌 거니까 지금까지 모아둔 돈을 다 써도 괜찮을 거야
- 이제 취업하면 시간 없을 거야 언제 또 여행하겠어!
(열심히 고민한척 적어 봤지만 사실 그냥 도피, 회피하고 싶었다.)
나의 첫 해외 여행지이자 어학연수를 시작한 곳은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단풍이 끝난 눈 내리는 12월의 밴쿠버였다.
내가 밴쿠버에 머물렀던 12-1월의 한 달 평균 강수일은 약 20일 정도로 한 달 중 비가 오는 날이 더 많다.
밴쿠버의 겨울은 우리나라의 겨울처럼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씨는 아니지만 자주 내리를 비로 인해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어학연수 왔으니 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할 수 있는 날씨 조건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비 온 뒤 맑은 날씨를 좋아하는 나에겐 한 달 내내 내가 좋아하는 날씨를 만날 수 있는 좋은 계절이라며 또 한 번 합리화를 하였다.
많은 합리화를 덧붙여 가며 시작한 밴쿠버 생활이 많은 강박으로 순탄하지 않을 거 같았지만…
역시 돈을 쓰며 노는 일은 너무 행복한 일이었다.
특히,
누군가는 이런 날씨가 우울하다고 하지만.. 잠시 멈춰있던 나에겐 다르게 느껴졌다.
밴쿠버의 비 온 뒤 상쾌한 공기는 미세먼지로 가득했던 나의 마음을 깨끗이 비워주고,
촉촉한 공기에 산란되는 햇빛은 마치 축축한 나의 마음에도 산란되어 따뜻한 빛으로 바꿔주곤 했다.
지금 그날을 생각하며 다시 써도 이런 문학(?)적인 구절이 나올 만큼 내 인생에 좋은 추억을 가져다 준곳이였다.
그때의 나의 기억 속 밴쿠버는
춥지만 따뜻한 온도, 축축하지만 상쾌한 습도, 을씨년스럽지만 포근한 도시,
모순 가득한 말이지만 결론은 모든 게 해피엔딩 같았던 밴쿠버.
나의 힘든 오늘 하루도 결국엔 그때의 밴쿠버 같길.
오늘 날씨가 밴쿠버 하네요.
[사진] 2014 Gastown, Vancouver, BC, CANADA
2015 Lynn Canyon, North Vancouver, BC, CANAD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