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시간에 미소짓다

세상을 새로이 보다

by 여느

시속 10킬로, 20킬로, 30킬로. 나이대에 따라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을 흔히 속력에 비유하곤 한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그러했다. 어렸을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80년, 길게는 90년, 100년까지 사는 인생이 어떻게 쏜살같다는 것인지 이상하게 여겼다. 하루살이에 비하면 영생과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한 해가 저무는 속도는 가속도가 붙은 듯 재빨라졌다. 인생이 찰나라는 말이 이제는 조금씩 와닿는다.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주어지는데 체감하는 정도는 왜 다를까.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는 경험의 축적치가 적다 보니 작은 일도 크게 와닿는 듯하다. 기억의 저장고에 채워진 게 많지 않다 보니 깊게 각인되는 것이다. 또 내게 미칠 영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건 하나하나가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도 있다. 점차 크면서 색다를 것 없는 일상이 반복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건이랄만 한 게 없는 매일반의 날이 대부분이기에 온전히 느껴지던 하루의 길이는 어느새 날림처럼 스쳐 지나가게 된다. 그렇게 일주일이, 한 달이 기억의 저편에서 바스러지고 연말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눈떠보니 한 해가 저무는 경험을 하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직장인이 되면서부터인지 그럴 나이가 되어서인지 모르겠으나, 집과 회사를 반복하다 주말에나 겨우 어디론가 슬그머니 나가보는 삶을 시작하면서 보신각의 타종소리는 좀 더 자주 찾아왔다. 1년 52주 중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만 오롯이 내가 쥐고 있는 시간이기에 1년은 365일이 아니라 100여 일에 남짓한 시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계산해 봐도 한 해가 찰나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서글프고 허무할 뿐만 아니라 무섭기까지 했다. 올해 내가 한 것은 없는 것만 같은데, 이렇게 또 한 해가 지나갔단 말인가. 한평생 백 년으로 어림잡아 길다고 여겼지만 일 년을 이처럼 금세 보내버리면 마지막 백번 째 해를 오래지 않아 마주하게 될 텐데. 덜컥 겁이 나고 조바심이 들었다. 연초 꿈꾸었던 것 중 일부라도 제대로 해낸 게 있나 되돌아보면 없는 것만 같다. 그래서 연말이 되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성취감보단 늘 비애에 젖는 기분이었다. 이룬 것 없이 늙어가기만 한다고 느꼈다.


그런데 아이를 기르며 시간의 흐름에 대한 감각이 다소 달라졌다. 육아로 인해 하루가 길게 느껴지다가도 달력의 날짜들은 금방 지나가버리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하루 온종일 시속 10킬로미터 미만에 머물러있는 아이의 시간관념에 붙잡혀있는 듯 밤이 더디게 찾아오다가도 요일, 일주일, 달력을 넘기는 속도는 내 나이에 맞게 흘러가는 기현상. 매일 쳇바퀴 같은 육아로 크게 기억에 남는 것은 없어서인지 일 년도 빠르게 스쳐갔다. 한 해가 금세 지나가는 것은 예전과 같다.


하지만 이제는 한 해가 가도 슬프지 않다는 큰 차이점이 생겼다. 시간이 흘렀다는 건, 아이가 그만큼 자랐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이만큼 길러냈다는 성취감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계발을 끝없이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살아왔던 이전에는 목표한 것을 어느 정도 해냈을지언정 늘 부족하고 더 성취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무엇보다 큰 성과를 이뤄내고 있다. 내가 늙어감에도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기쁘게 다가오기까지 한다.


어떨 땐 시간을 벌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의 귀를 통해 보고 듣는 것을 공유하면서 세상을 배우는 새로운 창구를 갖추게 된 기분이다. 나만이 홀로 접하는 세상과 나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마주하는 인격체와 함께 소통하며 쌓아가는 경험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다르다. 마치 손오공 분신술처럼 두 배의 삶, 그 이상의 생을 이어나가는 느낌이다. 게다가 아이가 질문하거나 같이 책을 읽으며 궁금해지는 것을 찾아보게 되면서 예전보다 폭넓은 방면에 관심을 두게 되고 공부하게 되니 얼마나 알찬가. 이전의 내가 갈구했던 자기계발을 육아로 시간이 없어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레 하게 되었다. 시간을 알뜰하게 쓰면서 아이도 길러내니 시간을 벌어들인다는 건 과언이 아니다 싶다. 아이와 함께한 이후 여전히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웃으며 보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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