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새로이 보다
문학을 전공했다는 것은 변에 지나지 않을 수 있겠으나, 여하간 나는 과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과학에 대한 나의 열정이 최고치였을 때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우주과학자를 꿈꾸었던 아이는 과학과 점차 멀어지더니, 어른이 되자 담을 쌓는 지경이 되었다. 편식하면 안 되듯 책을 읽을 때에도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골라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그러나 막상 손길이 가는 것은 인문학 분야였다. 과학도서를 통해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를 알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늘 느끼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다 아이를 만났다. 나의 편협한 시각이 때 묻지 않은 백지장 같은 시선에 영향을 미칠까봐 덜컥 걱정이 되었다. 점점 세상에 대한 물음이 많아지는데 내가 설명하기에는 모르는 것도 많고 아는 것도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부모는 아이가 세상에서 처음 만나는 선생님이라는데, 그 지위에 있기엔 너무나도 부끄러워 그간 미뤄둔 과학 도서를 곁에 두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은 생물학이었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처럼 번식에 관한 서적에 눈길이 갔다. 스스로가 2세를 낳고 소위 종족보존 행위를 하고 나니 이와 관련한 궁금증이 많았다. 얕게나마 이해한 바로는 나 역시도 하나의 생물로서 결국 유전자를 후손에게 전달하려는 본능에 충실하게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어쩐지 인정하기 싫은 기분이 들지만 새로운 사고를 하게끔 깨우쳐주었다. 예전에 읽었던 서인국의 <행복의 기원>도 떠올랐다. 모든 것이 나의 자유의지로 결정하고 행동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철저하게 계획되고 프로그래밍된 채로 움직였던 것일까. 로봇 대신 작디작은 유전자가 매트릭스처럼 나를 조종하고 있다는 상상마저 들었다.
자연스레 관심사는 뇌과학 분야로도 번졌다. 도킨스에 따르면 인간이 여타 동물과 다른 점은 생물학적 유전자 외에 문화적 유전자인 ‘밈’을 생성하고 전승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 사유를 담당하는 뇌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뇌는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뜻밖에도 뇌과학 관련 서적을 읽으며 어느 때보다도 깊이 사유하는 기회가 있었고 나만의 커다란 성찰을 얻었다. 뇌가 작동하는 원리는 fMRI와 같은 기술의 발전으로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된다든지 신경세포와 시냅스, 신경물질 등이 오간다는 것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관심 있는 것, 그러니까 인간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하며 사람마다 특정한 상황에서 행동을 달리 보이는 것 등은 단순히 뇌만 기기로 들여다본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통 속의 뇌’처럼 뇌만 꺼내놓는다고 해서 그것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는 인간이 의사결정을 하나 한다는 것은 과거의 경험과 현재 심신의 상태, 그리고 예상되는 미래의 상황 등을 모두 고려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달랑 뇌가 단독으로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전신이 그리고 과거, 현재, 미래의 내가 함께 호흡하며 비로소 결정을 내린다. 뇌가 핵심이긴 하겠으나 어쩌면 세포 하나만 없어져도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살점 조금만 떨어져 나가도 아프고 기분이 나빠 충분히 평소와 다른 의사결정을 하지 않겠는가. 인체는 그리고 나아가 자연과 생태계 전반은 감히 일부만 뚝 떼어놓고 살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했다. 나와 나를 둘러싼 주변은 결국 크고 작은 것들이 유기적으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앞서 탐독한 생물의 번식 본능과 관련해서도 흥미롭게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인간의 뇌는 현대 사회의 변화만큼 빠르게 진화하지 못한 면이 있어 3만 년 전 인류가 세상에 등장한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선사시대 인류가 생존을 위해 모험을 하는 것보단 현재에 안주하게끔 하는 경향성이 있다든지 이성에게 매력적으로 보여 2세를 생산할 가능성을 만들고자 과시를 한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인간 행동 양식의 뇌과학적 풀이는 결국 이기적 유전자의 내용과 궤를 함께하는 것이다. 학문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즐거움도 느낄 수 있었다.
이제는 과학의 다수 갈래 중에서도 가장 딱딱하고 냉엄하게 느껴진 물리학에도 조심스레 손을 뻗게 되었다. 나와 물리학 간의 아이스브레이킹 정도에 불과한 깊이이나 고전역학과 양자역학에 대한 도서와 강의영상 등을 통해 조심스레 독학을 했다. 얼마 전만 하더라도 살아 숨 쉬는 생명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지고, 교과서에서 물체의 질량과 속력을 구하던 것처럼 수학문제와 별다를 게 없이 다가왔던 물리학. 그야말로 나의 무지에서 빚어진 선입견이었음을 늦게서야 알아차렸다. 아직 부족한 게 너무나도 많지만 물리학을 파고들수록 고전역학에서 양자역학, 천체물리학에 이르기까지 물리학은 생물학과 그리고 우리 일상활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물리의 물은 사물뿐만 아니라 생물, 입자에서부터 우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대한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임을 뒤늦게 통감했다.
그간 과학이라는 학문에 빗장을 걸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 자신이 안타까웠다. 한편으로는 학문별로 세부전공을 만들어진 이유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대학에서 학문을 탐구한다기보단 산업화 이후 빠르게 전문가를 길러내어 사회에, 무엇보다 기업에 투입하기 위함이었던 건 아닌지 의심이 피어올랐다. 기업과 대학의 거대한 모략이었는지 아니면 취직이 절실한 학생과 사회적 요구에 맞춰 대학이 발맞춰 부응하는 방향으로 변모한 건지 그 선후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결과적으로 각자 전공별로 분절된 학문을 하고 있는 현실이 씁쓸했다. 나처럼 자칫 독서실 칸막이 같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지 않겠는가.
고대 그리스 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자이자 과학자이고 의학 지식도 갖춘 위인이었다는 것이 우리들에겐 놀랍게 느껴진다. 한 학문만 파고들기에도 쉽지 않은데 말이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의 평에 불과할 뿐 당대는 학문의 분류체계가 없었을 수도 있고 여러 학문은 한 길로 통한다는 것을 알고 무릇 학자라면 두루 섭렵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고자 한다면 다수의 학문을 연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학생 신분을 벗어난 지 10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다행이라고 여긴다. 아이 덕분에 과학을 가까이하게 되면서, 과학적 지식 자체를 넘어 학문은 연결되어 있지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왜 여러 방면의 책을 접해야 하는지,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교육 현장에서 왜 ‘융합적 인재’를 외치는지 와닿았다. 삶의 지혜나 살아가면서 질문의 드는 것에 대한 답이 경험 속에, 대화 속에, 책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길은 통한다는 옛말의 진정한 뜻을 알게 해 준 아이에게 다시금 고맙다. 아이 덕택에 깨우친 것을 아이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것은 나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너의 덕분이라고 덧붙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