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랑을 배우다

세상을 새로이 보다

by 여느

아이를 통해 미처 몰랐던 폭넓은 감정을 알게 되었다. 매일 내게 이러한 감수성이 있다는 것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아이다. 덕분에 감정에 대해 생각도 많아지고 이해의 폭은 넓어지는 중이다.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이만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싶을 정도로 놀라운 경험을 하고 있다.


중고교 시절 한 번쯤 사랑의 종류에 대해 접한다. 고대 그리스어로 에로스, 필리아 그리고 아가페로 나뉜다고 배웠다. 에로스가 연인들 간에 느끼는 감정으로 흔히 사랑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것이다. 상호간의 애정이 확인되어야 하고 육체적 관계를 동반한다. 필리아는 우정과 유사한 감정으로 상대방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사이라고 한다. 반면에 아가페적 사랑은 일방향이며 무조건적이고 끝없는, 어쩌면 희생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묘사된다. 부모님의 사랑이 대표적인 예다. 앞의 에로스나 필리아적 사랑은 살면서 경험해 보았으나 아가페적 사랑은 부모님께 받기만 했을 뿐 직접 겪어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머리로 이해는 하면서도 가슴 깊이 느껴보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아이를 낳자마자 즉각 생긴 감정은 아니었으나 양육을 하며 점점 내면에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는 매 순간 겪어가는 감정이 되었다.


평소 나는 무뚝뚝하고 감정이 치솟는 역치가 높은 편이라 쉽게 웃지도, 금방 울지도 않는 성격이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무디다고 볼 수 있는 내가 그간 세상을 바라보며 받아들이는 자극의 정도나 민감도는 아무래도 낮았을 것이다. 같은 소설이나 영화를 봐도 섬세하게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를 터, 이해는 하더라도 있을법하다 여기지 않고 작품 속에서나 가능한 감정이라 치부했다. 그러나 이제는 몰입의 정도가 달라졌다.


낯간지럽고 과장이 심하다 여겼던 사랑 노래가 어쩜 그리 내 얘기 같은지. 예컨대 ‘짜증내고 화를 내도 너의 미소만 보면 바보 같은 나’라는 ‘미소천사’ 노랫말을 들을 때 과거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막연한 거리감이 있었다면 지금은 아이에게서 느끼는 내 감정을 문자 그대로 담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말을 안 듣고 보채고 떼를 쓰면서 지치게 하다가도 한번 햇살같이 화사한 미소를 보여주면 그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이 녹아내린다. 실제로 이러한 감정을 맞닥뜨리고 나니,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들이라면 이성에게서 이런 사랑의 감정을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연인에 비해 부족한 나 자신을 비관하는 참담한 감정도 알 듯하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보내줄게요.’라며 연인을 떠나는 상황은 소설이나 영화에서 한 번쯤은 볼 수 있는 클리셰다. 그간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서로 사랑한다면 헤어지지 않아야지, 사랑하기에 떠나 준다니. 남겨진 이는 상처만 생길 뿐, 나중에 설령 이별할지라도 좋은 감정이 있다면 만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답답하기만 했다. 이해의 폭이 달라진 지금은 누군가를 아가페까진 아니더라도 열렬히 사랑한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보상심리나 소유욕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감정도 씁쓸하지만 이해하게 되었다. 연인 간의 애정은 헤어지면 남남이고 서로 온전히 별개의 인격체로서 존중해야 한다. 내가 이만큼 사랑한다고 해서 똑같이 해주지 않으면 서운할 순 있어도 강제하거나 소유하려고 하는 순간 법의 영역을 넘어설 수도 있다. 그렇기에 냉정하게 부정하던 감정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내가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사랑해 주는데, 내 모든 것을 다 바치는데, 아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서운함을 넘어 화가 나기까지 하니 말이다. 물론 어떤 이유에서든 이러한 심리는 허용되어선 안 된다. 애인이건 아이건 간에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은 동일하다. 크나큰 사랑과 함께 알고 싶지 않았던 감정마저 알아간다.


어쩌면 아이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가페적 사랑과 나르시시즘이 합쳐진 것이 아닐까. 내 몸과 마음은 물론 물질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까지 모두 쏟아부어도 아깝지 않은 사랑.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아이가 내 몸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서, 나를 닮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쉽사리 동일시하기 때문에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도 고개를 드는 것 같다. 재밌는 것은 아이가 에로스적 사랑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자녀는 에로스와 아가페, 나르시시즘까지 결합된 모든 사랑의 총체다. 사랑의 집합체인 내 아이 덕분에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랑의 깊이, 넓은 스펙트럼, 다양한 감정을 배웠다.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폭도 깊어졌다. 아이와 함께 오늘도 사랑을, 사람을, 세상을 배워나간다.

이전 11화#10 환경보호에 힘쓰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