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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에 의해 유기된 아내였다

남편이 이혼소송을 시작했다

by 보통날의 안녕

남편이 집을 나간 지 두 달이 지났다.

현관 앞에는 '수신자 부재로 등기를 전달하지 못했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나에게 올 등기라니...

설마, 아닐 거야.


내가 아는 그 사람은 적어도 그런 식으로 끝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남편을 믿고 싶었다.


다음날,

등기가 온다는 시간에 맞춰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한 장의 서류.

남편이 변호사를 통해 보낸 '이혼소장'이었다.


나는 소장을 받아 들고 서서히 무너졌다.


그 안에서 나는 '무능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었고

남편은 '희생자'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가 늘 자랑처럼 수식어로 사용하던 단어들이

소장에서 그의 이미지를 더 빛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손이 떨렸다.

두 손으로 소장을 들고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숨통이 조여 오는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

재산분할로 나에게 약 2억 원이 넘는 금액을 요구해 왔다.



다툼이 있던 날, 그는 집을 나가버렸다.

나는 시간이 지나서 서로의 감정이 가라앉고 나면 대화를 통해 합의점을 찾게 될 거라 믿었다.


이렇게 쉽게 '등기 한 장'으로 이혼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본 소장.

나는 검색을 시작했다.


이혼소장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혼소장 대응방법

이혼소송 변호사 비용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내가 법정싸움을 하게 되다니...

이런 일이 어떻게 내게 일어날 수 있는지..

현실을 받아들이는데 나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희귀 난치병으로 극심한 통증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소득이 거의 없는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통장에는 고닥 몇 달치 생활비만 남아 있었다.


이 상태에서 내가 법정 싸움을 해야 한다고?

변호사는 어떻게 구해야 하고 비용은 얼마나 드는 걸까?


혹시 소송을 했다가 더 많이 잃는 것은 아닐지

모든 게 두려웠다.






내 불행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2019년 봄,

나는 희귀 난치병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고열에 감기증상이 오래 이어져 큰 병원에 기보는라는 권유를 받고

별생각 없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내게 병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병명을 메모지에 적어 건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병에 대해서 검색을 시작했다.


"죽을 만큼 아프지만 죽지는 않는 병"

"그래서 환자 스스로가 목숨을 끊는 병"


섬유근육통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단을 받은 초반엔 그렇게까지 아프진 않았다.

회사 일도 계속했고, 하루 9시간 강의도 변함없이 해냈다.


체력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을 느꼈지만

'이 정도쯤은 내가 이겨낼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 몸을 덜 혹사시켰더라면 지금과 같이 건강을 잃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후회는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몸을 제대로 가누기 어려워지기 시작한 건 2021년도 여름부터였다.


피로도가 극심히지면서 장을 한번 보고 돌아오면

몇 시간씩 쓰러져 앓아누워야 할 정도로 건강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체력을 회복하기 위해 여러 운동도 해봤지만 몸은 점점 더 기력을 잃어가기만 했다.


통증은 멈추지 않았고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팔을 들 수 없어 혼자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통증은 온몸을 집어삼켰다.


어깨에서 팔까지, 허벅지에서 다리까지..

절단이라도 해버리고 싶은 고통.


약의 종류와 용량은 점점 강해졌고 아침저녁으로 수십 알의 약을 먹어도

통증은 억제되지 않았다.


결국 마약성 진통제까지 처방받게 되었고 그 용량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간수치는 올라가고

약물 부작용으로 체중은 20kg 가까이 늘어났다.






몸이 아프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통증이 아니었다.


아픈 사람에 대한 공감이나 존중이 전혀 없는 남편의 태도,

그게 나를 더 아프게 했다.


결혼 초부터 남편은 집안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전업주부가 아니었고 오히려 강의 때문에 저녁에 외출하는 일이 잦았다.

그럼에도 늘, 남편의 저녁식사까지 준비하고 나가곤 했다.


남편과 나, 둘 다 밤 10시가 넘어서 퇴근을 해도

청소는 늘 내 몫이었다.

남편은 피곤하다며 유튜브만 틀어놓고 누워 있었다.


그렇게 시작된 잦은 다툼.


결국 나는 사람은 고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이고

모든 집안일을 혼자서 하게 되었다.


아프기 전엔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되자, 집은 곧 쓰레기장이 되었다.


통증이 심해지고 기운이 없어 세탁기 한 번 돌리는 것조차,

혼자서 밥을 차려먹는 것도 힘겨운 일이 되었다.


남편은 그런 나를 돌보지 않았다.


나를 위한 밥 한 끼를 차려주기는커녕

"밥을 왜 제시간에 안 먹느냐"며 규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잔소리까지 더했다.


나는 원래 누구보다 규칙적으로 살던 사람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성실하게 일하며 생활을 했었지만

병이 악화되자 통증으로 약에 취해 하루 종일 잠을 잘 때가 많았다.


남편은 그런 나를 보며 "너 폐인 아니냐" "은둔형 외톨이 같다"며 비아냥댔다.


2019년부터 지금까지

남편은 단 한 번도 내 병원 진료에 동행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그는 나를 집 안에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특별히 싸운 것도 없는데 대화는 사라졌다.


나는 투병기간 동안 부부로써 존중은커녕 그 어떤 케어도 받지 못했다.

투명인간이 되어 집안에 갇힌 채,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의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아프다고 대단한 대접을 받고자 한 것도 아니었다.

난 그저 내 아픔에 대해 공감을 받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남편은 말했다.


"나는 너를 어떻게 간호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간호라는 걸 해본 적도 없고 그런 걸 배운 적도 없어서 못해."


그는 자신은 간호를 할 줄 몰라서 나와 살 수 없다고 했다.


스스로가 자신이 쓰레기라고 여러 번 외치면서 작은 쇼핑백에 태블릿과 충전기만 챙겨서 집을 나갔다.


간호를 배운 적이 없어서 아내의 병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한 남편...


남편의 직업은 의사다.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의대 교수이다.


의료인인 그가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 있는 아내와 함께 살기 싫다고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그가 집을 떠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생활비를 끊는 것이었다.





변호사는 변론서에 다음과 같은 글로 나를 표현했다.


"신청인은 부부간의 동거, 부양, 협조 의무를 저버리고

일방적으로 집을 나가 피신청인을 유기하였습니다."


나는 남편에 의해 유기된 아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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