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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병간호 3년, 모든 것을 잃었다

가장 힘든 시간을 함께 했는데, 돌아온 건 이혼 소장이었다

by 보통날의 안녕

2018년도 6월, 초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점심 무렵,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혼한 이후로는 급한 일이 아니면 서로 전화는 잘하지 않았기에,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전화를 받자 마자 그는 거친 숨을 쉬며, 자신이 쓰러졌고 구급차를 불렀으니 응급실로 와달라고 했다.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으로도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날 이후, 나는 그의 병과 싸우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를 간호한 시간은 내가 섬유근육통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꼬박 3년이었다.


그는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외래 진료를 예약하고 부축을 받아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날 이후부터 상태는 계속 악화만 되어 갔다.


편히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여러 겹 쌓아주고, 에어컨과 선풍기의 위치를 조절하며 그가 쉴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점심 무렵 병원에 갔었지만, 집에 도착하니 어느덧 저녁시간이었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남편도 나도 하루 종일 밥 한끼 먹지 못했다.

속이 울렁거려서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고 했기에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급히 만들어 억지로라도 조금 먹게 했다.




나중에서야 그는 A라는 병을 진단받게 되었다.

처음 쓰러졌던 날을 시작으로, 이후에도 여러차례 응급실로부터 연락을 받으면 그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세네 번 응급실을 찾았다.

급한 연락에 응급실로 향하는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었지만,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놀라움에는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었다.


어지러움증이 심할 때는 구토까지 동반하곤 했다.

밤늦게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날엔 집 안 곳곳, 안마의자에 까지 구토를 했다.

나는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로 향했고, 새벽에 혼자 돌아와 그가 남긴 흔적을 울면서 치워야 했다.


청소가 마친 시간은 새벽 4시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무일이 없었다는 듯이 나는 출근을 했다.

그가 아프고 나면서 부터는 내 일상은 늘 그런식이었다.


A라는 병이 두려웠던 이유는, 어지럼증이 갑작스럽게 심해지며 사람이 순식간에 아무곳에 쓰러진다는 점이었다.

최악의 경우, 운전 중에 의식을 잃게 되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혹은 쓰러진 장소에 위험한 물건이 있다면 머리나 몸에 큰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어지럼증 자체로 생명을 잃지는 않지만, 2차 사고를 유발할 수 있기에 항상 긴장 속에서 일상을 보내야 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도 쓰러지는 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쓰러지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점점 지쳐갔고 병 앞에서 무기력해지기 시작했다.


주말이면 작은 오피스텔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 많아졌고 나도 옆에 누워 조용히 TV보며 시간을 보냈다.


대화 없이 멍하니 화면만 응시하던 어느날,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울고 있었다.

왜 우냐고 묻지 않았지만,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겨우 어렵게 교수자리에 올랐는데, 이제 막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시작하려던 참인데, 병으로 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나도 그 옆에서 같이 울었다.


병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멈춰 서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잦은 쓰러짐으로 병에 대한 공포는 커졌고, 일상생활이 어렵다 보니 당연히 늘 불안한 생활을 해야했다.


나는 약해진 마음을 다독이며, 일을 조금 줄이고 건강 회복에 집중하길 권했다.

그가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서 힘이 되려 애썼다.


하지만 내가 섬유근육통을 진단 받고 의사에게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날, 그는 위로 한마디 없이 "그 병은 원래 안 낫는 거 아는 거 아니었어? 왜 울고 난리야"라는 말을 뱉었다.





그는 자신의 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아보가, 치료에 도움이 되는 병원을 찾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라고 믿는 외골수였다.


나는 병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환우 카페에 가입을 해서 사람들이 추천하는 병원이나 치료법이 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식단 관리를 하고 있었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하고, 저염식이나 아예 무염식을 실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바로 무염 반찬을 만들고, 국도 무염으로 끓였다. 밥은 쌀밥 대신 귀리밥으로 바꿨다.

물을 잘 마시지 않는 그를 위해 보리차나 옥수수차도 준비했다.

내가 준비한 저염식과 물은 실제 어지러움 증상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몸의 반응에서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식단을 바꾸고 나니 쓰러지는 횟수가 줄어 들었지만, 돌발적으로 쓰러지는 일은 여전히 있었다.


당시 나는 내가 하는 일만으로도 바빴지만, 늘 식단 관리를 위한 도시락을 준비했다.

하지만 그는 도시락이 귀찮다며 먹지 않았고, 음식물 쓰레기가 된 상태로 그대로 가지고 오는 일이 많았다.

늘 받는 것에 익숙했던 그는 도시락을 준비하는 일이 얼마나 번거롭고 피곤한지, 그리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것을 챙겼는지 고마움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힘들게 준비한 도시락이 음식물 쓰레기로 돌아오는 것이 섭섭했지만, 그 마음마저 감춰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결혼 생활 내내 그를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다.

좁디좁은 10평 남짓의 오피스텔에서 그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고, 나는 급히 집으로 돌아와 허둥지둥 음식을 만들었다. 아직도 그 모습이 나는 생생한데 그는 왜 그때 그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그는 자신이 쓰러지거나 위급한 상황이 오면 언제나 나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했다.

하지만 내가 아플 때, 쓰러졌을 때조차도 난 누구에게도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정작 내가 쓰러졌을 때, 나는 완전히 혼자였다.

그렇게 오랜 기간 정성을 다해 보살폈는데, 내가 아프자 그는 나를 외면했다.




언제든 돌발 상황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운전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간병인부터 운전기사 역할까지 해야 했다.

외부 강연이 많은 그를 위해 새벽에 일어나서 강의장을 데려다 주고 밖에서 기다렸다가 다시 연구실로 데려다 주는 일을 수 없이 해 왔었다. 강의장은 택시로 이동이 불가능했기에 나는 내 일을 포기하면서까지도 강연장이 어디에 있든 운전을 대신했다.


지방 어디라도 나는 그가 일이 있다고 하면 운전기사로 동행을 했다.

운전을 대신하면서 내 시간을 버리면서도 나는 부부로써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 조차도 소중히 여겼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했다.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병원을 함께 찾아 가는 일도 내 몫이었다.

그는 내가 병원에 동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 중 S병원에 어지러움 전문 센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가자고 했지만,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

나의 간곡한 설득으로 겨우 다니던 병원을 옮길 수 있었다.


그는 병원을 옮기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큰 소리쳤지만, 실제 병원을 옮기고 나서부터는 어지러움을 어느 정도 컨트롤 할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응급실에 가는 횟수도 확연히 줄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가 쓰러지고 6개월 뒤에 나는 지하주차장에 진입하던 차 안에서 생애 처음으로 공황발작을 겪었다. 이후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아가 약물치료와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내 커리어가 가장 정점에 달했을 무렵이었다.

너무나도 의외의 시점에 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그동안 일이 안 풀릴 때는 힘들고 슬퍼도 버텼는데, 이처럼 극단적인 증상은 처음이었기에 당황스러웠다.


초기에 병원을 찾았을 때, 나의 주요 상담 내용은 그의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였다. 간호하면서 겪은 고통을 그에게 말하지 못했지만, 처음으로 의사 앞에서는 말할 수 있었다.


첫 공황발작이 차 안에서 발생했기에, 의사는 운전을 피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지방 강의 스케줄을 동행해야 했기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운전대를 잡았다.


그렇게 그가 투병을 이후, 나는 6개월 뒤에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 받았고, 그리고 또 6개월 뒤 섬유근육통이라는 진단을 추가로 받았다.


당시에는 아팠지만 견딜 수 있는 정도였기에, 그를 케어하는 일과 살림, 내가 하는 일까지 아무렇지 않은 듯 감당해냈다.





그가 이혼소장을 보내기 3개월 전 부터 내 몸 상태는 최악을 치닫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몸에 경직이 일어나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통증 때문에 약을 빨리 먹어야 하는데 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일조차 고통스러웠다.


엄마는 그에게 자네가 아플때 우리 딸이 도와줬던 것을 생각해서라도 딸을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하셨다.


하지만 그는 변한게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는 케어를 충분히 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약으로도 가라앉지 않았기에 나는 온몸에 파스를 붙여야 겨우 통증을 견딜 수 있었다.

미리 파스를 대량으로 사두기는 했었지만, 가끔 파스가 떨어지는 날이면 그에게 사다 달라고 몇 번 부탁한 적이있다. 그는 그걸 "자신이 병간호를 한 증거"라고 했다.


하루종일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자 혼자서 밥을 제대로 챙겨 먹기가 어려워졌기에

그는 먹고 싶은 배달음식을 알려주면 대신 배달을 주문해 주곤 했다.

자신이 바쁠때 음식을 주문해주는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 줄 아냐며 자신은 할만큼 충분히 했다고 주장을 한다.


그래 고마운 일이다. 밥도 대신 배달 시켜주고.


하지만 배달음식을 대신시켜 주는 것은 그의 연구비에서 식비를 빨리 소진해야 했기 때문에 그런 이유로 주문을 대신 해준것이지 자신의 돈으로 한 일도 아니었다.

연구비를 급히 써 버려야 하는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 그런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혼 소송이 진행되면서, 그가 아픈 나를 유기했다는 우리 측 주장과 그런 사실이 없다 라는 상대측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을 하면서 서면이 오고갔다.


그러던 중,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문장을 마주했다.


서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피고(나)는 원고(남편)가 병을 앓고 있던 당시, 병간호는 커녕 비아냥 거리기만 했고, 원고(남편)은 병간호를 받은 사실이 없다."


믿을 수 없었다.


결혼생활 6년 중, 3년을 나는 그의 병간호와 살림, 운전, 생계까지 도맡아 하며 살았다.

그리고 결국,

그의 발병 이후 약 1년 만에 나는 희귀난치병 진단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병에 걸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의 요구와 필요에 내 몸을 혹사시키며 지나치게 많은 것들을 허용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그의 곁을 지키며 간병의 대가를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버림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신의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 견뎌 준 사람이 병상에 쓰러져 있는 지금, 어떻게 이혼 소장을 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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