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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은 예고 없이, 잔인하게 드러난다

진실은 늘, 가장 차가운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by 보통날의 안녕

이혼소장을 받고 이혼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에게 이혼을 원치 않는다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아무런 답도 없었다.

나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고 내가 보낸 메시지가 소송에서 증거자료로 요긴하게 사용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변호사를 선임했지만, 나는 여전히 소송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대화를 원한다는 의견을 전했지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지나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질 것 같았다.

결국 대화를 나누고자 퇴근 시간 즈음 그의 사무실 주차장 출구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고, 지하에서 차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차를 향해 클랙슨을 눌렀고, 손을 흔들었다.

어두운 저녁이었지만, 내 차는 밝은색 경차라 한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 나를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를 무시한 채 그냥 지나쳐버렸다.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문득 '그가 도착한 곳에서 만나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가 향하는 길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그는 이혼소장에서 자신이 부모님 댁에 머무르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향한 곳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였다.

낯선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서 차는 멈췄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너무 예상 밖의 장소를 마주하고, 순간적으로 어떻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운전석에서 누군가 내렸다.

그건 남편이 아니었다.


멀리서 봐도 어린여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흐믓한 표정으로 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차키를 몇번 누르고는 건물 안으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너 누구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내 안에 쌓인 분노를 다 쏟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몸을 숨긴 채,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액정 속의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분명 남편의 연구실에서 나온 차였다.

그렇다면 같은 연구실에 있는 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연구실 홈페이지를 검색해서 촬영한 얼굴과 연구실 직원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대조해 보기 시작했다.


한눈에 그녀가 누구인지 찾을 수 있었다.


'행정비서'였다. 남편보다도 족히 스무 살쯤은 어려 보이는 앳된 모습이 눈에 띄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뻔한 이야기.

왜 이렇게 내 이야기는 막장 드라마로 전개가 되는 걸까.

왜 하필... 상간녀도 '비서'인가.




집을 나가기 직전, 그는 "넌 왜 이렇게 말을 안들어, 고분고분하게 좀 굴어'라고 소리쳤다.

나는 "요즘 세상에 말 잘 듣는 여자가 어딨어?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의 얼굴에서 이상한 눈빛을 읽었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왜 없어? 있어!"


그때 느꼈다.

그는 지금, '말을 잘 듣는 여자'를 만나는 중이구나.


실제로 상간녀를 보고 나니, 그의 말을 잘 따를 것 같았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사준 벤츠 차량을 그녀가 출퇴근용으로 타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차에서 내리는 모습은, 자신이 꽤나 성공한 사람이라도 된 듯한 기분에 취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부모 집에 당연히 살고 있지 않았다.

정말 그가 말한 것 중에 진실은 도대체 얼마나 있었던 걸까?


그는 자신의 연구실 바로 앞에 오피스텔을 얻어, 자신의 표현대로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곳은 걸어서 출근할 수 있는 거리였다. 걸어서 출퇴근을 할 수 있으니 상간녀에게 차를 타라고 줬다는 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었다.


예전의 그는 늘 바빴다. 밤 11시 넘어서야 귀가했고, 주말에도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코로나 확진 당시에도 자택 격리 대신 연구실로 출근할 정도로 일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집을 나간 뒤, 그는 6시면 칼 같이 퇴근을 했고 저녁 시간과 주말엔 상간녀와 데이트를 하며 연구비를 유용해 즐기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마치 첩보 영화 속 요원처럼 움직였다.

한 해의 마지막 날도, 새해 첫날도 그들은 함께였다.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었던 그 장면을, 끝내 내 눈에 담고 말았다.

맛집을 찾아다니며 함께 웃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 장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TV에서는 새해를 축하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지만, 나는 삶의 방향을 잃은 채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렇게 몇달 동안, 나는 가만히 누워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통증이 조금씩 나아지며 나에게 매일 병원 가는 것은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정이었다. 하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처럼 병원도 가지않고 햇빛조차 닿지 않는 방 안에서 긴 시간을 은둔하듯 지냈다.


그나마 가끔 안부를 주고받던 엄마와의 연락도 끊고, 나는 완전히 고립된 삶 속에 머물렀다.


엄마는 택배로 반찬과 고기를 보내셨고, 톡으로 짧은 메시지만 남기셨다.

병원에 가지도 않는 나를 위해 약값을 대신 지불하고, 정성스레 지은 한약도 집으로 보내주셨다.


톡을 보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엄마는 항상 서툰 말투로 같은 말을 남기셨다.

"사랑한다, 내딸."


엄마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는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직장생활을 15년간 하며 나는 사내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다양한 불륜을 여러 번 목격했다.

생각보다 우리 주변의 불륜은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난다.

'친하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남녀 관계는 아주 쉽게 선을 넘고, '불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곤 한다.


당사자들은 자신들의 관계를 아무도 모를 거라 착각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는 동료들은 그 미묘한 변화를 금세 감지한다.

다만 조직의 평화를 위해서 애써 모른 척할 뿐이다.

그래서 소문이 났다는 사실을 가장 늦게 알게 되는 건 언제나 당사자들이다.


그의 연구실도 다르지 않았다.

이미 내부에서는 그 둘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대부분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연구 활동과는 무관한 행정보조였다.

연구비 관리나 서류정리가 주요 업무였고, 연구 활동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녀의 이름이 논문에 명단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고가의 비용이 드는 해외학회까지 동행했다. 이는 누구에게나 납득이 어려운 일이었다.


구성원들 모두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를 문제 삼는 순간 돌아올 불이익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이 이성을 잃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 나를 휩쓴 건 배신과 분노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에 대한 미움은 없다.


나는 스스로를 단단하게 세웠고, 오히려 그들이 불안하고 두려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가사조사에서 마주한 남편의 얼굴은 낯설 만큼 불안했다.

그는 자신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행복은 마음이 편안할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흔들리는 눈빛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스스로 만든 늪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드는 그의 모습이, 그저 안쓰러울 뿐이다.





이브의 사과처럼, 금지된 것을 맛보는 순간 인간은 더 큰 달콤함을 느낀다.

지루한 일상 속에서 몰래 즐기는 자극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일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탈을 행동으로 옮길지 말지는, 결국 그 사람의 신념이 결정하는 일이다.


금지된 불륜이 때로는 운명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 안에서 뜨거움과 짜릿함을 경험하며,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자극은 무뎌지고, 짜릿함은 일상에 파묻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착각한다.

자신들의 비밀은 결코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그러나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히 감춰질 수 있는 비밀은 없다.

비밀은 결국, 가장 예기치 못한 순간에,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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