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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결혼을 버리고, 진실을 마주하다

두려움의 끝에서 내가 시작되었다

by 보통날의 안녕

진실을 마주한 그 순간, 더는 ‘내가 착각한 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다.


내가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잔인했다.

관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나 있었고, 나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 일부러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이었다.


고분고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함께 살기 힘들다며 쏟아냈던 독설.

그 모든 폭언은 결국 혼인 파탄의 책임을 내게 떠넘기기 위한 계산된 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그가 집을 나간 이후, 상간녀를 실제로 보기 전까지 계속 나 자신을 의심했다.

정말 내가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서, 내가 너무 예민하고 불편한 존재여서 이혼을 피할 수 없었나... 그렇게 자책하며 끝없는 고통 속에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하고 난 뒤, 알게 되었다.

문제는 나에게 있지 않았다. 내가 감당해온 삶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기만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거짓된 결혼생활을 확인하게 되자, 복잡했던 생각이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애써 붙들고 있었던 억울함과 분노도, 나를 죄인으로 만들었던 자책감도, 서서히 의미를 잃어갔다.


내 잘못이 아니란 걸 깨닫고 나니, 모든 게 단순해졌다.

그 단순한 진실에서, 나는 그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폐허가 되어 빛조차 들지 않는 집 안.

메말라버린 공간에 맑은 공기가 스며들 수 있도록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나는, 다시 숨을 크게 쉬었다.


찬물을 한 모금 들이켜 정신을 가다듬고, 노트 위에 글자를 하나씩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하나씩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중 첫 번째는, 두려움 없이 이혼소송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날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 두 번째 소송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상간녀를 마주한 순간까지도, 소송을 하겠다는 결심조차 하지 못했다.

소송에 들어가는 비용, 고통스럽고 지독한 증거수집, 법적공방...

그 모든 과정을 내가 감당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계속해서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고, 결국 결심이 필요했다.


혼인 파탄의 책임과 그들의 불륜에 대해 법의 판단을 받는 것은, 나에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더 이상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존엄을 회복하는 문제였다.


법의 판단을 받는다는 건, 단지 상대를 벌하겠다는 의미만 가진 것은 아니었다.

내 삶의 경계를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선언이었다.


그동안 이미 변호사를 선임했음에도, 그동안 두려움을 핑계로 소송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나는 다짐했다.

"나는 반드시 이기는 소송을 하겠다."


거짓된 결혼생활로 나를 능멸한 그 사람,

모든 거짓말을 그대로 믿고 있던 내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그동안 얼마나 오랜 시간 속아왔는지를 떠올리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길 수 있는 싸움을 위해서 일어서야 한다고 다짐했다.




상간자 위자료 청구소송을 하기로 결심했지만, 내가 가진 명백한 증거는 하나도 없었다.


진실을 외면한 시간들.

그 안에서 나는 스스로를 보호하고 싶어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대가로,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나의 어리석음에 또다시 실망을 했지만, 후회만 하며 더 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무너졌던 시간만큼, 반드시 되찾아야 할 것들이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해야 했다.


그들은 퇴근하면 늘 함께였다.

일이 너무 많다며 새벽이 다 되어서야 퇴근을 하던 그 사람이, 상간녀와 함께할 때는 칼같이 6시에 퇴근해 맛집을 찾아다녔다.


밥 먹을 시간조차 없이 일을 하며 내가 번 돈으로 사준 벤츠는 이제 그들의 데이트 차량이 되었다.

그들은 늘 차 안에 함께 있었고, 상간녀는 마치 그 차의 주인인 것처럼 운전대를 잡고 거리를 활보했다.


코로나가 끝난 뒤 거리의 사람들 대부분이 자유롭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유독 그들만은 모자에 선글라스, 마스크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다녔다.

그들의 오히려 지나친 위장과 과한 은밀함은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눈에 띌 뿐이었다.


007 작전을 하듯 조심스럽게 만남을 이어가던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스킨십을 하고, 서로에게 기대고, 심지어는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연인인 척 행동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만 했다.

참담하고 굴욕적인 감정 속에서.


그의 오피스텔은 그녀의 공간이 되어갔다.

휴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만나 데이트를 즐기고, 오피스텔로 들어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저녁이 되면 다시 나와 맛집을 향했다.


나는 그들의 그런 일상을 하나하나 파일로 정리해야 했다.


화면 속,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그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약을 삼키며 고통을 삼켜야 했던 나.


내 손끝은 떨렸고,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으며 기록을 이어갔다.



상간자 소송을 준비하는 과정은 나라는 인간이 모든 존엄과 신뢰를 짓밟힌 현실을, 스스로 복기하고 증명해야 하는 가장 모멸적인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불륜을 내 손으로 증명하는 고통을 견뎌야 했다.




소장을 발송하고 나니, 마치 큰 산을 하나를 넘은 것 같았다.


그들이 남긴 수많은 흔적을 증거로 정리하며, 산산조각 난 내 삶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의 두 번째 소송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혼소송과 상간자 위자료 청구 소송.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이나 막막함이 아닌, "내가 이길 수 있다"는 묵직한 자신감이 내 안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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