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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날의 안녕 May 28. 2023

남편의 병간호 기간 3년,
난 모든 것을 잃었다

가장 힘든 순간을 함께 한 나에게 돌아온 결과는 참혹했다

안녕하세요. 보통날의 안녕입니다.

제 글에 공감을 해주시고 응원의 글을 남겨주신 분들께 감사말씀을  전하고 싶어서

본 글에 앞서 메시지를 남깁니다.

남편이 떠나고 지난 8개월의 시간 동안 혼자서 자책의 시간을 보내며 지냈습니다.

어떤 이유로 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며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았고 그 과정에서 정리된 생각들을 글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응원을 해주시고 따뜻한 마음을 전해 주실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었습니다.


많은 분들의 위로 덕분에 치유를 받고 있어요. 그리고 이 시간을 더 잘 보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건강을 걱정해 주시고 위로의 말씀과 여러 조언들이 너무 따뜻해서 눈물을 참 많이 흘렸습니다.

아직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다시 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삶을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다시 살아갈 힘을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제가 쓴 내용이 너무 막장이라 허구였으면 좋겠다는 말이나 혹은 소설 아니냐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안타깝게도 모두 사실입니다. 저도 이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매일같이 하고 있습니다.

모두 있었던 사실을 작성한 내용이고 변호사에게 전달한 내용을 기반으로 사실만을 작성하였습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일들이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구나, 

그리고 나에게는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일들을 경험하면서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많은 분들의 응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분들의 댓글 하나하나 너무 소중하게 읽고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힘내서 꼭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2018년도 6월, 초여름 날씨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점심시간 즈음해서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결혼을 한 이후에 급한 용건이 아니면 서로 전화는 잘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남편의 전화라니...

예감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받으니 남편은 자신이 지금 쓰러져서 구급차를 불렀다며 병원 응급실로 와달라는 말을

겨우 내뱉고 있었다.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날 이후로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남편의 병과 싸우며 지내야 했다.

남편의 간호는 내가 섬유근육통으로 몸을 못 일으키기 전까지 약 3년이라는 시간 동안 계속되었다.


남편이 응급실에서 링거를 맞고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외래 예약을 한 뒤에 부축해서 집으로 왔다.

응급실에서 처치를 받았지만 남편은 여전히 힘들어했다.

남편이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베개를 여러 겹 쌓아서 원하는 위치에 놔주고 에어컨을 틀고

선풍기의 위치를 바꿔주며 최대한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누울 자리를 만들어줬다.

점심시간 즈음에 응급실에 갔었는데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시간이 다되었을 때였다.

시간이 꽤 흐른 지금도 그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것은 남편이 처음 쓰러졌던 날은 내 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남편도 나도 하루종일 밥 한 끼도 먹지 못했었다. 너무 배가 고팠는데 남편이 밥을 못 먹겠다고 해서

어떤 음식을 해줄지 고민을 하고 그나마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급하게 만들어 억지로라도

조금 저녁을 먹도록 해줬었다.




나중에서야 남편은 A라는 병을 진단을 받게 되었다.

남편이 처음 쓰러진 날을 시작으로 그 뒤에도 여러 번 반복적으로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응급실로 달려가야 했다.

많게는 일주일에 세네 번 이상 응급실을 가게 되었다.

급한 연락을 받고 응급실로 달려가는 것이 일상생활이 되어 버렸지만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이 놀라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어지러움이 심해질 때는 구토까지 하게 되는데

밤에 몸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진 남편은 안마의자와 집안 구석구석에 구토를 했다.

긴급한 상황이라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갔고 

나는 새벽에 다시 집에 와서 혼자 울면서 남편이 남긴 흔적을 모두 치워야 했다.

그렇게 모든 청소까지 끝내고 나니 새벽 4시였다.

나는 다음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을 해야 했다.

남편이 아프고 난 뒤 나의 일상은 늘 그런 식이었다.


남편의 병이 무서운 것은 돌발적으로 어지러움이 심해지면서

갑자기 사람이 쓰러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게 되는 경우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혹은 쓰러지는 곳에 위험한 물건으로 인해

머리나 다른 부위를 크게 다칠 수가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다.

어지러움으로 사망을 하지는 않지만 2차 사고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늘 불안한 상태로 일상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아서 먹고 있지만 쓰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쓰러지는 횟수가 너무 많다 보니 남편은 지쳐있었고 병 앞에서 무기력해져 버렸다.

주말에는 침대에 누워 있는 일이 많았고 나도 옆에 누워서 주로 TV를 보면서 시간을 보냈었다.

서로 아무 대화 없이 TV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울었다.

왜 우냐고 묻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어렵게 교수가 되었는데 그래서 원하던 일들을 하나씩 해보고 싶었는데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각자 TV만 응시하고 있었지만 나도 따라 울었다.


남편은 자신이 병 때문에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될까 봐 두려워했었다.

잦은 쓰러짐으로 병에 대한 공포는 커지고 일상생활이 불가능 하니

누구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약해진 남편의 마음까지도 달래며 지금은 조금 일을 줄여서 하고

건강을 먼저 회복하는데 주력하기를 권하며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힘이 되어주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내가 섬유근육통으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너무 힘들어하며 울었던 때, 남편은 위로는커녕 치료가 안 되는 병인 거 이미 알고 있으면서

왜 울고 난리냐며 아주 냉소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나에게 이제부터 환자로만 살면 된다고 돈 몇 푼이나 번다고 그렇게 일을 하겠다고 난리를 지나며 

면박을 줬었다.

그때 남편이 나에게 자주 했던 말은 ‘돈에 환장했냐 ‘는 말이었다.

“돈 내가 주잖아. 부족해? 돈에 환장했어?”


직업은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자아실현의 부분이 크다.

어린 시절에는 더 잘해서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노력을 했지만

이제 20년간 지켜온 나의 직업은 나의 자아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로

나는 내 직업을 아끼고 사랑하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런 나에게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은 가치 있고 소중하다.

의사인 자신의 직업은 고귀하고 내가 하는 일은 그까짓 것 정도로 밖에 생각을 안 했다니

남편의 그런 표현에 난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이 우습게 본 그까짓 일로 자신이 전임이 되기 전까지 경제적인 뒷받침이 되어 주었는데

내 직업에 대해서 쉽게 그만둘 수 있는 것쯤으로 이야기하는 태도에 너무 화가 났었다.


난 정말 궁금하다.

그때 나를 통해 받은 케어와 위로 그리고 경제적 지원 그 모든 것은 자신 혼자서 이룬 것이라 생각해서

나에게 그렇게 냉소적이었던 것인지.... 아니면 모두 잊어버린 것인지...





남편은 자신의 병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아보거나 좋은 병원을 찾아보는 것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라고 믿고 있는 외골수이다.


나는 남편의 병에 대해서 공부하기 위해 환우 카페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병원이나

치료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식단관리를 하고 있었다.

물을 많이 마셔야 하고 저염식 혹은 아예 무염식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장 무염으로 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였다. 그리고 밥은 쌀밥보다는 귀리밥으로

물을 잘 마시지 않는 남편을 위해 보리차나 옥수수차 같은 것을 준비했다.

남편은 내가 차려준 대로 식사를 며칠간 했고 어지러움증에 무염과 물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식단을 바꾸면서 쓰러지는 횟수가 줄어들었지만 언제든지 돌발적으로 쓰러지기는 했었다.


그때 나는 내가 하는 일만으로도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지만 남편을 위해 도시락 준비도 늘 했었다.

하지만 내가 싸준 도시락을 귀찮다는 이유로 먹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 상태로 그대로 가지고 

오는 일들이 많았다.

남편은 늘 받는 것에 익숙하기에 도시락을 싸는 일이 얼마나 귀찮고 피곤한지... 그리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도시락을 준비했는지 고마움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힘들게 싼 도시락이 음식물 쓰레기로 돌아올 때 섭섭했지만 난 그 마음마저 감춰두어야 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난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을 위해서 열심히도 살았다.

그 좁아터진 10평도 안 되는 오피스텔에서 남편은 시름시름 누워 있었고

난 집에 급히 돌아와 허둥지둥 음식을 만들었던 모습이

지금도 난 생생한데  남편은 왜 그때 그 일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몸이 아프면 짜증이 늘기 때문에 남편의 눈치를 봐야 했고

머리가 아프다거나 귀에서 소리가 난다고 하면 바짝 긴장을 해서 남편의 상태를 주시해야만 했다.


남편은 자신이 쓰러지거나 위기의 상황일 때 나에게 가장 먼저 연락을 했다.

하지만 난 내가 쓰러지거나 아플 때 아무에게도 연락을 할 수 없었다.


정작 내가 쓰러지니 나는 혼자였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남편을 보살폈는데 남편은 내가 아프니

날 외면해 버렸다.




남편은 언제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운전대를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남편의 운전기사까지 했었다. 쓰러지기 전에 잡은 외부 강의 스케줄은

취소를 할 수가 없기에 억지로라도 가야만 했다.

오전 일찍 진행되는 강의는 집에서 너무 먼 거리였고 일주일간 강의가 진행되어야 했다.

집에서 목적지까지 오전 출근시간에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나는 새벽에 일어나 남편과 함께 강의 장소까지 일주일간 동행을 했다.

남편을 데려다주고 근처 카페에서 내 업무를 보면서 강의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연구실이나 집으로 데려다주고 나면 나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방에 강의를 가야 할 때도 택시를 탈 수 없기에 남편을 위해 동행을 해야 했다.

난 바쁘다고 거절을 하거나 짜증을 낸 적이 없다.

그때는 함께 할 수 있는 그 시간들 마저도 소중하다고 생각을 했었고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치료에 괜찮다는 병원을 찾아서 같이 병원에 가는 것도 모두 내 역할이었다.

남편은 내가 동행하는 것을 매우 당연하게 생각을 했었다.


여러 병원을 전전하다가 S병원에 어지러움센터가 있다는 것을 알고 함께 가자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을 하다가 내가 사정사정을 하고 나서야 병원을 옮기게 되었다.

남편은 큰 차이가 없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S병원을 다니고 난 뒤에 어지러움을

어느 정도 컨트롤 할 수 있게 되었다.


어지러움이 시작될 것 같은 느낌이 올 때  약을 먹으면 쓰러지는 일까지는

막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응급실을 가는 횟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공교롭게도 남편이 2018년 6월에 처음 쓰러지고 난 뒤

그해 12월에 나는 지하주차장을 들어가는 차 안에서 공황발작을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

그렇게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해 약물과 상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내 커리어가 가장 정점에 달했을 때였는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받게 되었다.

그동안 일이 그렇게 안 풀릴 때는 오히려 우울하고 슬프고 힘들어했었지만 

이런 극단적인 증상은 없었는데 의외의 증상에 당황스러웠다.


초기에 병원을 방문했을 때 나의 주된 상담 내용은 남편의 병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간호를 하며 스트레스가 정말 많았지만 남편에게는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을

처음 말할 수 있었다.


처음 차량에서 공황발작이 일어났기 때문에 의사는 운전을 하지 말라고 권고했었다.

하지만 남편의 장거리 강의 등의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기에 난 억지로 운전대를 잡았다.

매우 위험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담당 의사에게 남편이 아파서 내가 운전을 꼭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의사는 한숨을 쉬며 나를 말렸지만 나는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18년도 12월에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 받은 후 19년 4월 경에 류머티스내과에서

내가 섬유근육통이라는 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이 아프지만 견딜만했기에 남편을 케어하는 일과 살림 그리고 내가 하는 일들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했었다.

게다가 2018년 5월 남편이 내 명의로 회사를 설립하게 되었는데 그때 CEO가 갑자기 그만두면서

내가 그 일들을 맡아야만 했다.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일은 정말 힘들었다. 사무실을 구하는 것부터 직원관리 서비스 개발까지 

모두 내가 맡아야만 했다. 


남편은 일이 잘되면 자신의 성과로 남들에게 이야기를 했고 일이 잘되지 않으면 모든 책임을 나에게 물었다.

결국 남편은 회사를 접자고 했었다. 직원들을 내보내는 것도 내가 해야 했고 사무실 정리도 나의 일이었다.

그때 회사를 본점과 지점으로 나눠서 사무실을 2군데나 운영을 했었다. 지방의 사무실을 정리하려고

나는 수차례 지방을 들락거리며 집기들을 옮겼다. 이삿짐센터나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책상을 분리해서 

차에 싣고 지방에서 내가 사는 곳까지 5번 정도 왔다 갔다 하면서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섬유근육통 환자는 무거운 것을 들면 근육 부분에 자극이 심해져 몸이 심하게 아프다.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남편은 늘 바쁘다는 이유로 함께 하지 않았다.

나는 돈이 아까워 내 노동력으로 이사를 모두 했었다. 정말 나는 바보처럼 살았다.


21년도 봄에 사무실 2곳을 모두 정리하는데 나는 이삿짐센터 없이 혼자 힘으로 물건들을 

다 정리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그렇게 증세는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을 했다.


그해 여름에는 그토록 바라던 신축 아파트에 입주를 하게 되었다. 

이사날짜도 남편이 시간이 되는 날로 미리 잡고 이사준비를 했다.

집에 있는 물건을 처분하는 것도 이사준비도 모두 내 몫이었다. 

남편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그런 문제로 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꾹 참기만 했다.


오피스텔에서 결혼생활 중 5년 가까이를 살았고 신축아파트로 들어가게 되는 

그렇게 역사적인 날 남편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고 이사를 함께 하지 않았다.


큰 물건은 모두 처분했기 때문에 포장이사를 하지 않고 작은 용달 하나만 불렀는데 그게 큰 화근이 되었다.


난 점점 체력이 바닥이 났는데 그 모든 이사가 내 노동력으로 진행이 되었다.

새로운 아파트에 입성하자마자 나는 집을 예쁘게 꾸미거나 정리할 기운도 없이

그렇게 드러눕게 되었다.


몸은 그때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난 아침에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전신의 통증은 극한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 몸을 갈아 넣으며 아픈 남편을 케어하고

남편이 차린 회사 뒤치다꺼리까지 당연히 내 일이라고 생각하며 묵묵히 해왔다.


남편이 나에게 보낸 소장에는 내가 사업을 하는데 돈 1억 5천을 대출받아 달라고 해서 

자신이 대출을 받아줬다는 내용이 있었다. 

1억 5천은 남편이 투자받았던 돈을 투자자에게 돌려주고 자신의 지분을 확보하겠다고 해서

받은 대출이었다. 법적으로 내 명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졸지에 나는 나랑 관계도 없는 분야인 

헬스케어 회사를 운영하다가 남편에게 피해를 끼친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아마 회사가 잘 되었다면 자신의 회사라고 주장을 했을 것이다.

회사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니 내 명의로 되어 있다고 나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나의 이 억울함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작년 여름 나는 몸이 너무 좋지 못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온몸에 경직이 일어나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통증 때문에 약을 빨리 먹어야 하는데

약을 먹기 위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도 힘들었었다.


엄마는 남편에게 자네가 아플 때 우리 딸이 도왔던 것을 생각해서라도

딸을 도와달라고 부탁까지 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크게 변한 것이 없었다. 자신은 나를 위해 케어를 했다고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이 너무 어이가 없다.

나는 약으로도 통증이 해결이 되지 않아 파스로 온몸을 도배를 해야지 겨우 통증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파스를 미리 대량으로 구매를 해두었지만 가끔 파스를 다 써서 없을 때가 있는데

그때 남편에게 파스를 사다 달라고 몇 번 부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사다 준 것으로 자신은 나를 케어할 만큼 했다고 주장을 한다.


또한 내가 요리하기도 힘들고 해서 밥을 잘 챙기지 못하게 되어 

남편이 먹고 싶은 배달음식을 알려주면 배달을 대신시켜 주었다.

자신이 바쁠 때 내 음식을 시켜준 것이 얼마나 귀찮고 힘든 일인 줄 아냐며 나에게 할 만큼 했다고 말을 했다. 


그래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배달음식을 대신시켜 주는 것은 남편이 나를 생각하는 것도 있지만

연구비 카드에 식비를 빨리 써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준 것이지 자신의 돈으로 밥을 시켜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연구비를 급하게 소진해야 할 일이 없었다면 나에게 그런 배려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집을 나간 날, 큰 다툼이 있었는데 그때 참 나에게 독한 말을 많이 내뱉었다.

"네가 아픈 게 내 탓이야? 왜 나한테 그러는 건데..."


나는 울면서 답했다.

"그래 니 탓이다. 다 니 탓이야. 그럼 내가 이렇게 아픈 게 너는 아무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남편은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말을 했다.

"그래.. 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그렇게 다툼은 지속되었고 남편이 떠났었다.


남편 때문에 100% 내가 병을 앓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남편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허용했고 남편이 시키는 일들을 무리해서 진행하면서

내 몸을 돌보지 못하고 혹사를 시킨 것은 사실이다.


남편을 돌보며 대가를 바란 것은 당연히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이런 미래가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이 가장 힘든 순간 옆에서 지켜주고 모든 일들을 대신해 준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이혼 소송을 할 수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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