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통날의 안녕 May 14. 2023

결혼을 하며 스스로 호구가 되었다

남자의 성공을 위해 희생하는 구질구질한 80년대 드라마를 찍었다

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건 내가 서른일곱이 되던 때 였다.

엄마가 다니는 절에 남편의 母도 다니고 있었고

각자 자식문제로 불공을 드리러 온 신도의 사연을 듣고 서로 잘 맞을 것 같다며

스님이 연결을 시켜주셨다.


난 결혼은 하고 싶지 않다고 몇 차례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었다.

하지만 당시에 내가 하던 일들이 잘 되지 않았고 나는 힘든 시기를 보낼 때였다.

만약 그때 내가 하던 일이 잘 되고 있었다면 더 자신 있게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말했겠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에게 여자는 그냥 결혼해서 살면 그게 행복이라며 내가 하는 일이 잘 되지 않으니

뭘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결혼이나 하라고 말씀하셨다.


난 결국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모르는 사람들은 의사남편 만나서 팔자 좋게 살았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남편을 내가 처음 만났던 당시는 남편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남편은 늦은 나이에 의대공부를 막 마친 상태였다.

의사면허만 있으면 돈을 엄청 버는 줄 알겠지만 남편은 공부는 잘했을지는 몰라도 돈 버는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의사이긴 하지만 남편이 하고자 하는 분야는 기초의학으로 환자를 직접 치료하는 일이 아니다.

대부분 기초의학은 다른 과에 비해 수입이 턱없이 적기에 의사들은 대부분 기피하는 분야이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남편이 교수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비전임으로 이름만 교수인 비정규직 노동자로써 전임교수가 될 꿈을 꾸고 있었을 때였다.


억지로 나간 자리였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나도 박사과정을 하며 교수의 노예로 생활하다가 결국에는 학위도 못 받고 그만 둔지 몇 년 안 되었던 때였기에 공감대 형성도 잘되었고 또 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는 생각에 호감도 있었다.


그렇게 연애라는 걸 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렇게 되었지만 사랑도 했었다.




당시에 첫 만남을 갖고 서로의 부모님께는 만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기로 했었다.

호감을 갖고 만난다고 하면 분명 결혼을 빨리 하라는 잔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서로 비슷했기에 모든 이야기는 잘 통했다.


연애 1년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좋아 보이던 시기가 지나 상대의 단점이 눈에 들어오며

작은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연애 1년 반이 넘어서면서 관계는 느슨해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질질 끌며 만남을 지속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때가 왔다고 느꼈다.

헤어지거나 아니면 결혼을 선택하거나, 관계의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고 생각을 하고 

처음으로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었다.


남편은 자신의 경제사정이 좋지 못해 결혼을 하기 힘들 것 같다고 말했다.

빚만 있고 소득이 턱없이 적었기 때문에 자신은 결혼을 해서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려울 것 같다고 했다.


그 지겨운 공부를 마치면 여유롭게 살 줄 알았던 남편은 막상 비전임교수로 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처음 받은 월급에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월급 300만 원... 그 돈으로 대출을 상환하고 월세를 내고 부모님 

용돈도 드리고... 돈을 모을 여유도 없다고 했다.


나는 별로 놀랍지 않았다.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우리 학교 교수들의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부터 

조사를 했었는데 그때 알게 된 월급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교수가 되면 엄청난 돈을 벌줄 알고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교수 월급으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할 때 알게 된 사실을 남편은 급여를 받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셈이 빠르지 못한 사람이었다.


늦은 나이에 의대 공부를 다시 시작했지만 부모님의 지원을 받을 정도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고시원 생활을 하며 긴 공부를 마쳐야 했다.

당시에는 서른이 넘은 대기업 다니는 남자들은 대부분 결혼을 해서 아이도 낳고

작은 아파트도 대출을 받아 구입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사는 것 

그게 당연하고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을 했다.

가정을 꾸리고 주말에는 나들이도 하는 친구들을 보며 고시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다른 인생을 살던 남편은 평범한 삶을 무척이나 갈망했었다.


왜 난 이런 말에 흔들린 것이었을까... 결혼을 할 수 없는 경제사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냥 헤어졌으면 지금의 결과는 없었을 텐데...


그때의 남편을 보며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마음이 아팠다.

결혼은 하지 않겠다는 내 신념과 연민 사이에서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결혼을 선택하고 내가 경제적인 부분에 대해서 책임을 질 테니 그럼 둘이 같이 살면서 

하나씩 만들어가자고 제안을 했다.


하지만 나는 결혼에 대해서 정말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남편의 단점을 내가 안고 평생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것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남편의 부모,

그리고 남편의 불안정한 미래 등 여러 가지 고민들이 많았다.


그때 내게 결혼을 안 해도 괜찮아... 결혼이 인생을 완성시키는 것은 아니야.. 

너에게 가장 좋은 선택을 해야 하는 거야...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더라면

나는 나만 생각하고 나를 위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과는 달랐고 나는 매몰차게 헤어지지 못했다.


그때 나의 가장 큰 잘못은 내 결혼을 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들만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자식의 결혼을 그토록 원하는 부모님, 의사와 결혼한다고 하면 분명 좋아하시겠지..'

'저 불쌍한 남자... 내가 성공하는데 도움을 줘보자.'

'내가 결혼을 하면 형제들은 마음이 좀 더 편하겠지..'


결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나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생활 내내 나는 남편을 위해 살았다.


지팔지꼰이라고 나는 내 팔자를 제대로 내가 꼬아버린 것이다.

'내가 뭐라고 남의 인생인데 왜 나를 희생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인가...'


그때 나는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착각을 크게 했었다.




그렇게 호구가 되기 시작했다.

나는 가지고 있는 돈 1억과 8천만 원 전세자금 대출을 받아 1.5룸의 오피스텔을 전세로 얻었다.

그리고 살림살이는 내가 쓰던 가구나 아니면 카드로 샀었다.

가전제품은 오피스텔이니 특별히 필요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작은 집에서 가진 돈도 하나 없이 빚만 있는 남자와 결혼을 했다.


당시에는 내가 하던 일이 잘되기 시작해서 소득이 높은 편이었다.

남편의 급여에 비해 내 소득은 3배 정도 높았지만 나는 불만은 없었다.

부부라면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했고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아낌없이 나누었다.


나는 8천만 원의 대출을 6개월도 안 되는 시점에 다 상환을 했다.

전세대출이 없어야지 저축도 하고 나중에 더 넓은 집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득이 갑자기 늘었지만 나는 정말 아끼면서 살았다.


나는 커피는 절대 사 먹지 않고 밖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때는 늘 김밥을 먹었다.  

원래 가난하게 살았던 것이 익숙한 우리는 소비를 특별히 즐기지 않았고

10평도 안 되는 집에서 매일 김치찌개만 끓여 먹었지만 행복했었다.


내가 하는 일이 잘되는 반면 남편은 연이어 교수 임용에 탈락을 했다. 당시 남편은 좌절을 크게 했었다.

그때마다 우는 남편을 잘 안아주고 토닥여줬었다. 물론 나도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남편을 구슬려 자신이 전임으로 올려준다고 말하며 모든 일을 남편에게 시키는 나쁜교수를

믿지 말라는 조언은 오래전부터 했었지만 내 말을 잘 믿지 않았다.

남편은 나이만 많지 지난 30대의 대부분을 공부하는데 시간을 보내버린 탓에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사회생활 초년생 같았다.


희망고문을 계속하며 자기 일을 떠넘기고 자신의 책까지 대신 쓰게 만드는 짓은

예전에 내가 박사과정 때 겪었던 일과 유사했다.


또다시 비전임으로 학교에 남아 있기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남편이 연구하는 분야 쪽에 이름이 잘 알려진 타대학의 교수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타대학의 연구교수 자리였다. 전임자리가 아니었기에 남편은 고민을 많이 했었다.


나는 적극적으로 이직을 권했다. 지금 학교에서는 네가 계속 학교에 남아 있을 거라 생각을 할 거다.

언제든 나는 떠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 학교에서는 연구실적이 나올 수도 없었고

그러니 누군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전임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남편이 연구하는 분야는 당시에 일부 의사들 사이에서는 그게 무슨 연구가 될 수 있냐며

필요성에 의문을 품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잘되고 있으면 신념을 가지고 밀어 부칠 수 있지만 하는 일이 잘 안 되는 남편은

자존심도 많이 상해있었고 이길로 가는 것이 맞는 건지... 진로 고민도 많이 했었다.


나는 분명 남편이 하는 연구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더 해보자고 남편에게 힘을 많이 실어 주었다.


옮긴 대학에서는 남편이 연구하는 분야를 앞서서 시작한 학교이다 보니 연구비 수주도 잘 이루어졌다.

외부활동이 많아지면서 남편은 자신의 자리를 찾은 듯이 정말 열심히 일을 했다.


문제는 그때부터 학과장으로 있는 교수의 괴롭힘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괴롭힘은 정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남편은 너무 괴로워했다.


나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다고 했다.

남편은 자신이 가장인데 그만 두면 어떻게 하냐며 걱정을 많이 했다.


나는 남자라고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능력이 되는 사람이 돈을 벌면 된다고 했고 괜찮으니 그만두고 다른 방법을 찾자고 제안을 했다.


남편은 괴롭히는 교수에게 가서 그만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때 교수가 상당히 당황을 하며

“가정이 있는데 이렇게 쉽게 그만둘 수 있겠나. 다시 생각해 보고 이야기하지.”


일반적으로 기혼 남자들은 일을 쉽게 그만두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남편을 괴롭혔던 것이었다.

남편이 아주 통쾌하게 이야기했다고 나에게 자랑을 했었다.

“결혼을 했지만 와이프가 저보다 돈을 훨씬 잘 벌어서 제가 좀 놀아도 괜찮습니다. 그만둘게요.”




남편이 백수가 되었다. 

난 남편에게 누군가에게 기대어 교수를 시켜줄 거라 기대하면 안 된다는 조언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브랜드가 되어 유명해지면 사람들은 분명 너를 찾을 것이라고 하며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책을 써 보자고 했다.


예전부터 남편은 교수가 되면 늘 책을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보통은 유명해지면 책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책을 내고 유명해질 수도 있다고 

이 분야에 제대로 된 책이 없으니 책을 써서 이름을 알릴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줬다.


출판사 미팅도 같이 했고 책이 제일 많이 팔리는 시기에 맞춰서 출간 일정에 대해서 계획도 세웠다.

연구실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고

약 5개월간 책을 쓰고 출간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연구하는 분야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책 제목까지 만들어줬다.


생각보다 더 반응은 좋았다. 과학의료분야이기에 많이 팔리는 책은 아니었지만 

그때 그 분야에 대한 키워드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남편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식될 수 있었다.


남편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강연이나 인터뷰도 많아졌다.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이 임용에서 2번 떨어진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전임교수 제안이었다.


남편이 그토록 원하던 일이 책을 내고 단 한 달 만에 성사가 되었다.




남편이 전임교수로 임용이 된 이후에도 나의 호구짓은 계속되었다.

나는 목돈이 모이면 남편과 주로 상의를 많이 했는데 

자신의 차가 너무 격이 떨어져서 창피하다며 차를 바꿔달라고 요구를 했다.

나는 대출을 상환하거나 투자를 할 생각으로 이야기를 한 것인데 차를 바꿔달라고 하니

이 사람이 왜 이러나... 당황스러웠다.


이 전까지는 늘 소박하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전임교수가 되니 남편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남편의 월급이 크게 오른 것도 아니었고 돈을 엄청 잘 버는 상태도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남편이 요구한 벤츠를 현금을 모두 지불하고 사줬다.

주변에서는 미쳤다는 말이 많았다. 


그래 정말 내가 미친년이다.




집값이 오르기 전 투자를 하고 싶어 오피스텔을 2채를 사려고 알아보고 있었다.

남편은 집값이 오르지도 않는데 왜 사냐며 사지 말라고 했었다.

그러는 동안 물량이 빠지고 나는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오피스텔 1채를 매수를 해버렸다.

부동산에서는 남편 명의로 하는 것이 세금이 덜 나가니 그렇게 하는 편이 좋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당연히 나는 이혼을 하게 될 거라 생각해보지 못하고 남편 명의로 집을 매수했다.

이혼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던 나는 100% 내 돈으로 남편에게 그대로 오피스텔을 상납한 꼴이 되어버렸다.


벤츠 차량과 오피스텔은 내가 번 돈을 모아서 산 것인데

명의가 남편 것으로 되어 있다고 이혼소송에서는 남편의 재산으로 이미 설정이 되어 있었다.

소장을 받고 내가 뒷목을 잡은 것은 경제적 기여도가 내가 훨씬 높음에도 

자신은 의대교수이기 때문에 소득이 나보다 많다고 쓰여 있었던 것이었다.


남편의 소득이 나보다 높아지게 된 건 내가 몸이 아파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부터였다.

21년부터 나는 일의 양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건강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에 

일을 예전처럼 하기는 어려웠다.


나는 결혼 생활 6년 동안 남편에게 생활비를 딱 10개월 받았다.

그것도 내가 건강이 안 좋아 일을 많이 못하니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를 한 이후였고

내가 아프기 시작한 21년도 11월부터 남편이 집을 나가기 전 22년 8월까지였다.


심지어 나는 이혼을 할 줄도 모르고 생활비 받은 것과 일을 조금 해서 모아둔 돈을 

작년 봄에 투자하라고 3천만 원을 남편에게 줬었다. 


어쩌면 남편은 작년 봄부터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때 남편에게 내가 없었더라면 남편은 지금 자리에 올 수 있었을까?

아마 임용이 2번 탈락된 학교에 계속 남아서 누군가가 와서 도와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생각도 책을 쓸 생각도 당시에 하지 못했을 것이다.


능력이 있어도 그 능력을 잘 이용하지 못하면 교수가 되기는 어렵다.

세상에 공부 잘하고 연구 잘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교수가 되려고 줄 서 있는 사람도 

많지만 그들의 방법은 대부분이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


나는 공부만 할 줄 아는 바보를 전임교수가 되는데 도움을 주었고 

경제력이 거의 없는 남편을 걱정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이 되었다.

심지어 살림도 내가 맡아서 다 했다.


나는 남편이 원하는 것을 이루게 되면 우리는 행복해질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니라 남편이 행복해지는 것이었다.


남편은 작년 봄에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승진을 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너무 기뻐했었다.


하지만 남편이 부교수로 승진을 하고 난 뒤,

6개월 만에 나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는 처절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지금은 마치 내가 보이스피싱이나 사기꾼에게 장기적으로 돈을 가져다 

바치는 사기를 당한 것 같다. 


오랫동안 남편은 코인투자를 해왔고 나는 코인투자를 하라고 

돈을 2017년부터 정기적으로 남편에게 줬었다. 

하지만 소장의 재산항목에 가상화폐에 금액은 모두 빠져있었다.

남편은 그동안 나에게 받은 돈을 모두 은닉해 버렸다.


내가 산 오피스텔과 벤츠는 자신의 소유로 재산분할 대상에서 모두 빠져 있었고

공동명의의 아파트를 5대 5로 나누자는 어이없는 소송을 걸어온 것이다.


지난 6년간 내가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왜 나는 나를 위한 것을 지난 6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너는 너고 나는 나인데... 왜 우리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나는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혼자서는 남자의 성공을 위해 희생을 하는

구질구질한 80년대 드라마를 찍고 있었던 것이었다.


너무 수치스럽다.




제가 브런치에 작성한 글은 소설이나 허구가 아닌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내용을 모두 사실 그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이런 여자가 있구나 생각이 들어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모두 제가 경험한 일들입니다.


변호사에게 전달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거짓이나 과장 또한 없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