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나락에서 마지막 선택을 했었다
작년 추석, 남편이 떠나고 집안의 모든 것들은 멈춰 버렸다.
세상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다 멈춰 버린 느낌이었다.
나는 어떤 미동도 없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동안 계속 악화되는 통증으로 인해 내 인생 최악의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이 통증이 사라지는 날이 올 수는 있을지...
내 의지만으로 해결하기 힘든 절망 앞에 우울증은 더 심해지고 있었다.
몸이 많이 아프거나 불편해도 그 시간을 잘 받아들이고 가족들과 가깝게 지내며
오히려 더 행복한 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의 유튜브도 보면서 힘을 얻기도 했다.
아프다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니 이 통증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어보기도 했었다.
어떤 날은 컨디션이 괜찮아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갑작스럽게 몰려드는 통증으로 인해 조금씩 싹트려고 하는 긍정의 씨앗은
강한 통증 앞에 속수무책으로 사라져 버리기를 반복했다.
다시 일어서려는 노력과 좌절이 반복되면서 나는 내가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졌다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 바닥밑에 끝이 보이지 않는 지하가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이렇게 아픈 것 외에 더 최악의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생각을 했었는데
그런 일이 일어났다.
남편의 이혼 요구로 난 바닥을 뚫고 끝도 보이지 않는 지하로 추락 중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많은 시련을 견디며 살아왔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어떤 힘든 일이 있어도 잘 견뎌낼 자신도 있었다.
나의 그 자신감을 시험이라도 하려는 듯 신은 내게 2 연타를 날려버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지? ’
내가 왜 병에 걸리게 되었는지, 남편이 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는 것인지
도대체 인과관계가 명확한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원래 태어날 때부터 재수 없는 년이니까...'
정말 살만하면 일이 터지고 좀 숨 쉴만하면 일이 터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재수 없는 년은 이렇게 인생을 사는 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나는 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나에게 쏟아 낸 독설은 내 머리에 계속 남아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너같이 센 여자가 정말 싫어. 억척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아끼고 아주 지겨워.”
남편은 늘 센 여자가 싫다고 했었다.
연애를 할 때도 그랬었다. 하지만 나는 태생부터 센 여자였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내가 갑자기 센 여자로 변신을 한건 아니었다.
그렇게 센 여자가 싫은데 왜 결혼을 한다고 했을까?
남편은 센 여자는 싫지만 자신의 수준에 적당히 맞는 교육을 받고
돈도 좀 버는 여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사람인 것이다.
센 여자의 경제력에 기대어 편히 잘 성장해 놓고 쓸모가 없어지니 센 여자라서 같이 못살겠다고 한다.
억척스럽고 구질구질하게 아끼고 아껴서 여기까지 온 건데... 그런 내가 싫다고 했다.
남편 역시 내가 처음 만났을 때는 돈이 없어 본인은 더 구질구질했었다.
자신이 나중에 부자가 되더라도 싸구려 음식을 계속 먹을 것이며
차도 계속 지금의 차를 타겠다고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다.
그랬던 그가 전임교수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벤츠를 사달라고 나를 졸랐다.
남편이 예전보다 돈을 잘 벌긴 하지만 부자 놀이를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아파트 대출금도 많이 있었고 미래를 위해서 나는 아껴서 돈을 모아야 한다고
늘 이야기를 했지만 내 말에는 콧방귀를 뀌었다.
소득이 옛날에 비해 조금 늘었다고 남편은 백화점에서 가격을 확인하지도 않고
쇼핑을 즐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남편에게 아웃렛을 가자고 하거나 너무 비싸다고 못 사게 말리기도 했었다.
자신이 이 정도도 못 입냐고 나에게 면박을 자주 줬다.
옛날에 나에게 지금과 똑같이 살겠다고 말하던 그 순수했던 사람을 어딜 가고
허세에 가득 차서 물건을 아끼는 나를 구질구질해서 같이 못살겠다고 한다.
센 여자가 너무 싫다면서 그래서 나와 못살겠다고 이혼을 요구했다.
고분고분해지라며 이혼에 대한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몸이 아파서 돈도 벌 수 없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나에게
고분고분해지지 않으면 같이 못 사니 순종적으로 바뀌라는 요구였다.
생활비를 줄 테니 순종하라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혼자서 살아갈 힘이 없는 나에게 이혼이 치명적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아는
남편은 나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살거나 아니며 버리려고 시비를 걸며 싸움을 유도하고
결국 이혼이야기까지 꺼낸 것이다.
이런 이야기에 '앞으로 내가 너의 말을 잘 듣고 시키는 대로 하고 살게.. 이혼만은
하지 말아 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난 도저히 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 사람은 날 얼마나 더 비참하게 만들려고 저러는 걸까...
나는 그냥 꺼져달라고 했다.
남편은 이혼서류 보낼 테니 그런 줄 알라며 소리를 지르고 집을 나갔다.
인기척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집에 전화가 왔다.
명절을 잘 보냈냐는 엄마의 전화였다.
나는 남편이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예상대로 엄마는 크게 화를 냈다.
어린 시절부터 엄마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친구엄마에게서 전화가 오거나 하면
내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나를 혼내셨다. 자신을 낮추는 것, 자식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덕목이라고 생각하며 지금까지 살아오신 분이다.
엄마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지만 엄마가 쏟아내는 나에 대한
비난은 가슴을 뚫어 버리는 것만 같은 고통을 줬다.
남편이 나에게 어떻게 해 왔는지를 너무 잘 알면서 엄마는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렸다.
왜 넌 참을성이 없냐는 것이었다.
아빠의 폭력을 50년 가까이 견디며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엄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전화를 끊기 전에 마지막 말을 전했다.
"엄마.. 나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을 이렇게 밖에 못살았어요..... 너무 죄송해요."
전화를 끊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수면제와 최근에 처방받은 약들을 모두 꺼냈다.
나는 우울증과 불면증이 있기 때문에 언제든 내가 세상을 떠나려고 한다면
떠날 수 있는 것들이 늘 내 곁에는 있었다.
이렇게 계속 아픈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지만 그래도 나는 죽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늘 나를 붙잡아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믿고 의지했던 유일한 두 사람,
그 두 사람을 통해 들은 말은 그 어떤 폭력보다도 아팠고 쓰라렸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가 계속 살 수 있을지, 지금 내 현실에 맞서 내가 일어설 수 있을지
무서웠다.
먹어야 할 약을 모두 준비를 하고 떠나기 전에 내가 뭘 해야 하는지를 생각했었다.
엄마에게는 마지막 인사를 했으니, 그걸로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했다.
나의 고양이, 나만 믿고 나만 의지하며 지내 온 아이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내가 없으면 밥도 먹지 않고 대소변도 보지 않는데 내가 떠났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이 아이를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없는 나에게 이 고양이는 자식이고 집에만 항상 있어야 하는 나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를 닮아서 예민하다. 환경이 바뀌거나 다른 사람들이 간식을 줘도 잘 먹지를 않는다.
이런 아이를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계속 쏟아졌다.
내가 울 때 테이블 위로 올라와 평소에 보여주지 않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말을 하지 못하지만 그 어떤 위로 보다 따뜻해서 내가 아이를 키우는 입장이지만
나는 아이에게 정신적으로 의지를 많이 했다.
내가 발견되는 시점을 예상할 수 없기에 최대한 오랜 기간
아이가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사료와 물을 곳곳에 배치를 해두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간식도 지루하지 않게 찾아먹을 수 있게 놔두었다.
약을 먹기 시작했다. 모아둔 약과 새로 처방받은 약들..
이 정도면 충분하게 먹었다고 생각을 하고 반쯤 몸을 뉘일 수 있는 의자에 누웠다.
그리고 아이와 마지막 인사를 했다.
잠에서 깨어나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내 옆에서 고양이 그루밍 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내 머리 위에서 딱 붙어서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모든 기억이 사라져 버렸다.
일어나 보니 나의 아이와 함께 부모님이 계시는 본가에 있었다.
정말 죽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다시 현실을 마주해야 할 생각을 하니 너무 끔찍했다.
가족들은 나의 소식에 모두 충격에 빠졌고 명절 연휴는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였다.
나는 그날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내가 마지막에 한 말이 마음에 걸려
남동생을 급히 불러 밤에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몰라서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지만
남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119를 불러 현관문을 열기 위해 우울증 환자가 자살을 한 것 같다는 신고를 했고
명절에 이런 사건이 워낙 많기에 경찰까지 함께 출동을 하며 초동대응을 굉장히 빨리 했다고 했다.
구급대원이 와도 문은 부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찰이 남편과 통화를 했고 겨우 비밀번호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면서도 나타나지 않는 남편의 행동에 엄마는 분노를 터트렸다.
아무리 미워도 함께 산 시간들이 있는데 경찰의 자살 소식에도 꿈쩍 안 하던 남편이었다.
작년 여름, 남편과 엄마는 통화를 자주 했었다고 한다.
그때 남편이 내가 자살을 할 거 같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고 엄마는 이야기를 했다.
내가 자살을 할 거 같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남편은 집에 혼자 있는 나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치를 했다.
내가 자살할 거 같다는 말을 엄마에게 자주 했다는 말이 나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자살을 할거 같은 아내를 그 상태로 방조해 버린 것이다.
어쩌면 남편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를 바란 것 같다.
최근 변호사를 통해 남편의 변론서를 읽었다.
거기에는 내가 '자신의 화에 못 이겨서 자살을 한 것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이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할까.. 그만큼
남편은 내 목숨을 정말 하찮게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전문의가 아니라고 하지만 의사로서 너무 무식하고 최소한의 생명에 대한 존중조차 없는 표현이다.
그렇게 나는 도망가는데 실패를 했다.
명절 연휴 마지막날 나는 나의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경찰이며 구급대원이 지나간 자리를 모두 정리하고 청소를 했다.
신은 정말 내게 호락호락하지 않구나.
내게 일어난 이 엄청난 사건을 남겨두고 나를 도망치지 못하게 살려두었다.
이미 지하세계로 나뒹굴고 있으니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반드시 다시 일어서야 한다.
제가 브런치에 작성한 글은 소설이나 허구가 아닌 제가 살아오면서
경험한 내용을 모두 사실 그대로 작성한 것입니다.
21세기에도 이런 여자가 있구나 생각이 들어 믿을 수 없으시겠지만
모두 제가 경험한 일들입니다.
변호사에게 전달한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으며 거짓이나 과장 또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