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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날의 안녕 Jun 11. 2023

나를 위해 처음으로
생일 케이크를 사봤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생일이지만 내가 축하할 수 있어서 괜찮다

작년 가을의 초입에 있었던 그 사건 이후,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어느덧 초여름이 되었다.

살면서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늙기만 한다는 생각이 들어 서글픈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시간이 흐른다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를 처음 깨닫게 되었다.

추운 겨울과 따뜻하지 않았던 봄을 지나며 분노와 원망, 자책, 미움으로 가득 찼던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6월이 시작되었다.

하루를 마친 저녁에 차를 타고 나가서 나를 위한 생일 케이크를 처음 샀다.

혼자 먹는 케이크이지만 큰 것으로 그리고 그동안 내가 먹고 싶었던 것으로

큰 맘을 먹고 비싼 것으로 샀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생일.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날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으셨다. 이유는 정말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물어도 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나는 법적으로 정해진 생일에 맞춰 축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스타벅스에서조차도 무료 생일 쿠폰을 법적인 날짜에 보내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 생일이 아닌 날에 난 생일 축하를 받는 행위를 지속해 왔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서 난 법적인 생일을 버렸다. 진짜 내 생일을 되찾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생일이지만 나의 가족인 남편에게만 축하를 받으면 된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동안 아무 문제 없이 잘 지내왔었다.


남편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작년 생일이었다.


그날은  병원 진료 예약이 되어 있었고 선거날이라서 남편이 쉰다고 했다.

남편은 전날 밤에 어쩐 일로 나에게 병원을 같이 가자고 했었다.

참 별일도 아닌데 남편이 병원을 같이 가준다는 말에 난 신이 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병원에 갈 시간이 다 되었는데 남편은 일어날 생각도 안 하고 있었다.

같이 안 갈 거냐는 나의 종용에 귀찮으니 혼자 다녀오라고 했다.

병원을 다녀오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하며 남편은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기운이 쭉 빠졌지만 이른 아침 진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내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


병원에서 돌아와 선거를 하러 같이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하품을 하며 너무 피곤하니 대충 짜장면이나 시켜 먹자고 제안을 했다.

이때 알았다. 남편이 내 생일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나는 화를 내며 내 생일인 것도 모르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정말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을 봤다.

나는 화가 난 채로 집으로 돌아왔고 내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뒤 방문을 열어 남편은 '난 니 생일이 언제인지 모르겠어'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카카오톡에서 알려주지 않아서 내 생일을 모르겠다는 당당한 외침인가...

남편의 당당한 태도가 너무 당황스러웠다.


가끔 와이프의 생일을 깜빡했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었다.

이런 이야기는 결혼 생활 중에 흔히 있는 에피소드 중에 하나이다.

몰랐다면 와이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달래고 선물을 준비해서 억지로라도 풀어주면

쉽게 해결되는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그날 남편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밥을 같이 먹자는 말도 흔해빠진 선물도 미안하다는 사과도 없었다.


저녁에 냉동실 문을 열어보니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덩그러니 냉장고에 들어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남편과 함께 하는 지난 시간 동안 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먹지 않는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난 냉동실의 아이스크림케이크를 보며 남편 머릿속에서 나에 관한 데이터가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스크림 케이크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가 남편이 떠난 뒤 음식물 쓰레기 통으로 들어갔다.


평소 케이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맛있는 케이크 하나 사 와서 미안하다며 자리에 앉히고

축하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면 끝날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남편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급격히 관계가 틀어진 시발점은 내 생일이었다.




올해는 직접 케이크를 사서 초를 꽂고 나의 고양이와 함께 자리를 함께 했다.

어색하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고 틀에 박힌 축하한다는 말 따위는 이제 필요 없어졌다.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크림을 좋아하는 고양이에게 손가락을 살짝 찍어 케이크를 맛보게 해 줬다.

내 손가락 끝의 크림을 맛있게 핥는 아이의 모습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한 시간이었다.


인생에도 하프타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말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인데 최근에 그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나는 올해 마흔다섯이다. 내가 아흔까지 산다고 계산을 하면 지금이 하프타임이고

인생의 후반전을 시작하는 시점이다.


하필 인생의 전반전 끝에 이런 일을 겪고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만약 이런 일이 없었다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돌아볼 기회도 없이 그대로 살았을 것이다.


나의 인생 전반전은 말 그대로 폭망해 버렸다.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려 내 인생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았다.




보통은 많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을 한다.

하지만 나는 불행하게도 내가 태어난 것을 축하하는 사람은 없었을 거라 확신한다.


내가 다섯 살 때 정확하게 기억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다.

여동생이 꼬물거리는 신생아로 엄마와 함께 집에 왔을 때였다.

출산한 엄마의 몸조리를 해주실 분이 없어서 할머니께 아들을 낳았다고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고 엄마의 산후조리를 도와달라고 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서울에 오시자마자 동생의 기저귀를 열어 보고는 계집애를 낳아놓고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했다고 엄마에게 호통을 치셨다.

그리고 그 길로 바로 시골로 내려가셨다.

엄마는 정말 크게 우셨다. 다섯 살 아이에게 세상 전부인 엄마가 우는 모습은 두려움 그 자체였었다.


나중에 내가 크고 나서 이모와 전화통화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때 그 일의 전체 스토리를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여동생을 낳고 정말 매일같이 울었었다. 울면서 미역국을 먹고 울면서 동생과 나를

돌봤다. 엄마의 눈물로 다섯 살 아이는 얌전하게 아기와 엄마옆을 지키고만 있었다.


아버지는 종갓집의 종손이시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이지만 내가 태어나던 그때만 하더라도

대를 잇는다는 것은 집안에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였다.

엄마에게는 집안의 대를 잇는 아들을 낳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엄마에게 첫째 딸인 언니가 태어났다. 반드시 둘째는 아들을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정부의 정책도 있었고 아이를 많이 낳으면

돈이 많이 드니 부모님도 둘만 낳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둘째를 임신하게 되었고 태몽도 아주 큰 아들을 상징하는 꿈을 꾸고, 먹고 싶은 음식이며 배의 모양

모든 것이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기에 기대를 안고 아이를 낳았다.

불행히도 아들이라 철석같이 믿었던 아이가 '나'였다.


만약 내가 태몽이나 먹고 싶은 음식 등 이런 모든 정황이 여자아이 같았다면

애초에 낙태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신의 실수인지 장난인지, 이상하게도 남자아이같이 씩씩한 여자아이로 태어났다.


여동생이 태어났을 때 엄마가 울었던 것처럼 아마도 내가 태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내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막내 동생으로 아들을 낳게 되었다.

9급 공무원인 아버지의 월급으로 아이 넷을 키우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많이 힘이 드는 상황이었기에

할머니는 늘 나와 여동생 그리고 아들을 바로 낳지 못한 엄마를 대놓고 미워하고 구박을 했었다.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

아들을 너무 낳고 싶었던 엄마는 나를 아들로 키웠었다.

짧은 바가지 머리에 남자아이들이 입는 속옷과 옷을 입혔었다.

어렸을 때 덩치도 큰 나를 남장을 시켜 유모차에 태워서 다니면 모르는 사람들은

아들이 잘 생겼다고 부러워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다.


엄마는 지금도 '네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나도 내가 아들이었으면 부모님이 애들 넷을 키우느라 고생을 하지 않았을 텐데라는

죄책감마저 가질 때가 많았지만 정말 듣기 싫은 소리 중에 하나였다.

내 뜻대로 될 수 없는 일인데 엄마는 딸이 중년의 나이를 먹었는데도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하신다.


백일 사진이며 돌사진까지 어린 시절의 내 사진은 모두 남자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예쁜 원피스를 입은 언니와 짧은 머리에 멜빵 반바지를 입은 나,

이렇게 다정한 남매의 모습으로 사진을 많이 남겨두셨었다.

 

하지만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이 대부분 나를 비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이 동네 할머니나 아주머니들이었는데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ㄲㅊ도 안 달고 태어나서 지 부모 고생시키는 것'

'저게 그만 아들이면 딱 되는데'

'얼렁 가서 ㄲㅊ 달고 다시 와라'


ㄲㅊ도 없는 계집애한테 재수 없게 아들옷을 입힌다는 핀잔을 주는 어른들도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가 잘못 태어났다' 그리고 '필요 없는 아이다'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은 미운오리새끼 그 자체였고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한 공부를 해본 적이 없는

나는 영혼이 가난한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연애밖에 없었다.

20대의 나는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사랑을 받는 것이 좋아 연애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연애라는 것이 결국은 상처만 남긴 채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30대에는 나를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좋은 먹잇감으로 희생되었고 상처들로 인해

나는 결국 사람을 가장 무서워하게 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존중이나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인정을 받고 싶어서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타인의 눈치를 보며 인생을 살았다.

그래서 나는 늘 불안했고 걱정이 많았고 행복하지 못했다.


나는 내 불행의 원인을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경제적인 부를 이루면 행복해질 거라 생각하고 악착같이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인정을 받았고 돈도 많이 벌게 되었지만 행복이 아니라 뿌듯함이 잠시 왔다 사라졌다.


그렇게 마음의 병이 커져만 갔고 마음의 병은 결국

몸으로까지 퍼져 나의 모든 것을 멈추게 만들었다.




투병을 하며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나는 평이 좋은 드라마를 많이 찾아서 봤는데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좋은 작품을 많이 만나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을 지금은 하게 된다.


지속적인 통증으로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삶에 대한 회의가 왔을 때

나는 '눈이 부시게'라는 선물 같은 드라마를 만나게 되었다.

태생부터 잘못된 시작이었기에 내 인생은 망했다고 자포자기하는 어리석은 나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라며 인생은 모두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그리고 내 삶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도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를 보며 가장 오열을 했던 대사는 오로라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로라는 원래 지구 밖에 있는 자기장인데 어쩌다 보니 북극으로 흘러 들어왔다는 거야.

그 말인즉슨 오로라는 조물주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에러다 이거지.'


신이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닌 신의 실수로 인해 만들어진 오로라...


나는 늘 신의 실수로 태어나서 말 그대로 재수가 없는 년이라고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들은 신이 장난을 치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하늘을 보고 욕을 한 적도 많았다.

나 좀 그만 괴롭혀 달라고...


하지만 신이 실수로 만든 것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준 것이다.

신이 날 괴롭힌 것이 아니었다.

잘못 태어났어도 난 아름답게 살 수 있었는데 과거의 일에 매몰되어

나를 괴롭힌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던 것이다.




후반전에 앞서 하프타임에 내 인생의 전반전을 돌아보고 있다.

정신과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오랫동안 나를 괴롭힌 쾌쾌 묵은 지난 시간의 상처들을

소화되지 않은 이물질을 토해내듯이 조금씩 뱉어내고 있다.

눈물과 콧물이 미친 듯이 터지는 날도 있고 잊고 있었던 상처가 밖으로 꺼내져

너무 가슴이 아파 집에 와서까지 하루종일 오열을 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나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살면서 나에 대해서 내 안에 깊은 곳의 나를 보지 못했었다.

내가 어떤 것을 할 때 행복해하는지, 나를 쉬게 해주는 것들은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바보처럼 일만 하고 돈만 벌면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생각을 했었다.

시간 낭비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던 내가 지금은 시간을 낭비하며

멍하니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기 시작했다.


나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마음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미래에 대한 걱정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처음으로 케이크를 사봤다.

늘 누군가를 위해 구입했던 케이크를 처음으로 나를 위해 가장 비싸고 좋은 것을 샀다.


꼭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를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축복해주는 사람이 한명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 이제 내가 날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면 된다.


카톡으로 선물을 받는다고 진심으로 내가 태어난 날을 축하해 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받는 것을 기대하지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마흔다섯 살 생일에 초를 켜고 기도를 했다.

내 가난한 영혼을 가득 채워 단단한 사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

제가 작성한 모든 글은 소설이 아닌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을 중심으로

작성한 에세이 입니다. 

거짓이나 과장 또한 없는 모두 실제 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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