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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지나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by 토리가 토닥토닥

성 발달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을 계획하면서 각나는 분들이 있다. 아마 사회복지사로서 잊지못할 분들이기 때문이다.


해님(가명)씨는 지적장애인으로 20대 중반의 임신 3개월에 접어든 분이었다. 남편은 왜소한 체격의 컴퓨터 자수공이었다. 관장님이 네가 담당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첫 상담은 임신 출산 이야기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른 복지사를 통해 해님 씨의 옛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해님 씨는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같이 살던 엄마, 오빠도 지적장애인이라 했다. 아빠 없이 엄마와 오빠 셋이 살던 해님 씨에게 엄마와 오빠는 무차별적으로 성적 노출을 자행했다고 했다. 나는 그것을 성적학대라 생각한다.


과정에서 해님 씨에게 올바른 성적 개념이 정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엄마, 오빠와의 관계가 힘들어져 서울로 올라온 해님 씨는 당시 버디버디와 같은 인터넷 채팅을 통해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고 했다. 남편분은 30대 중반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컴퓨터 자수 워 힘들게 모은 돈으로 포장마차를 차렸다가 한 번에 날리고 당시 도박에 매달려 계신 상태였다.


그런 남편분과 상담을 진행하는데 남편분이 속이 가끔 너무 아플 때가 있다고 했다. 남편분을 모시고 고대구로 병원으로 갔다. 진료와 검사를 마치고 의사와 남편분과 내가 마주 앉았다. 의사가 근엄한 얼굴로 위 사진을 보여주며 암이 식도와 위 사이에 생겼다고 이야기하며 남편분이 아닌 나를 쳐다봤다. 의사의 신호를 알 것 같았다.


남편분을 잠시 내보내고 의사의 설명을 마저 들었다. 의사는 위암 3기 같다. 암은 가장 불리한 위치인 식도와 위 사이에 생겼다. 일단 열어봐야겠지만 예후가 좋지 않다고 했다.


의사와의 대화를 마치고 남편에게 어디까지 전달해야 할지 갈팡질팡 했다. 결론은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병을 숨기는 것은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관장님이 남편분을 불러 나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전달하셨다. 암이 3기 정도로 보이고, 식도와 위 사이에 생겨 바로 수술을 하라는 권고를 받았다고.


전부를 전달하기에는 해님 씨와 태어날 아기가 생각났다. 그때가 봄과 여름 사이였다.


남편분의 가족을 만났다. 어머니는 85세가 넘으신 허리가 굽은 노모였고, 형은 필리핀 여자와 결혼하여 공장 기숙사에서 살고 있었다. 도시빈민의 삶을 온전히 살고 계신 가족이었다.


그러나 가족에게 알린들 남편분의 수술치료비와 임신출신을 대비할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이라 는 건 너무 뻔한 이야기였다. 암울하고 우울했다.


아기는 무럭무럭 해님 씨의 뱃속에서 자랐다.

나는 개인사정으로 다음 해 3월 퇴사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해님 씨와 남편분이 살고 있던 집에서 급하게 나와야 했다. 계약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돈만 남았다.


결국 나는 절차를 뛰어넘어 관장님의 직접 오더를 받아 움직이는 담당 사례관리자로 책임을 더하게 되었다. 후원금으로 복지관 정문 앞에 월세를 얻어 이사를 했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해님 씨와 남편분의 결혼식을 지원했다. 박수홍 씨가 사회를 보는 저소득가정 합동결혼식이었지만 하얀 웨딩드레스와 턱시도 정장은 우리를 충분히 설레게 했다. 남편분의 어머니와 가족들도 모두 참석했다. 남편분이 TV에 출연해서 인터뷰까지 했다.



남편분은 고대구로병원에서 수술을 했다. 남편분의 어머니와 내가 함께했다. 의사가 수술 도중 나왔다. 개복했으나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어 약품만 잔뜩 집어넣고 다시 닫았다 했다. 남편분의 어머니가 휘청하시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후에 치매가 왔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게 서있다가 어머니를 위로했고 택시를 태워 보내드린 후 그 절망감에 길에 서서 한참을 울었다.



해님 씨가 아기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남편분은 한 두 달을 약으로 버티셨다. 그 사이 복지관 후원금으로 약값과 생활비를 지원했는데 돈을 가져다 드리고 난 후 반지하 월세방 방문 너머 흐느끼던 남편분의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마음에 쌓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다. 복지관 2층 프로그램실에서 백일잔치를 했다. 남편분은 살고 싶다며 우셨고, 남편분 가족은 아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입양이 결정되었다. 해님 씨는 웃었지만 무표정했다.


남편분은 무료지원이 되는 강북구 성가 복지병원에 입원하셨다. 오로지 고통을 받지 않고 잘 죽기 위해서였다. 모르핀을 몸에 달지 않고서는 그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을 했다. 남편분은 나를 볼 때마다 우셨다. 다시 가족 옆으로 보내달라며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우셨다. 너무 간곡한 소리에 달래어보고, 또 달래어 보았으나 남편분의 죽을힘을 다한 요청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나 스스로와 남편분에게 화를 냈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겨울을 그렇게 보냈다. 그 겨울은 개인적으로 새로운 출발을 위한 퇴사이기도 했지만 끝까지 그분들과 함께하지 못한다는 미안하고 아픈 마음이 남아 있었다. 인계받을 복지사에게 상황과 파일을 전달한 후 인사를 드리고 왔다.

그리고 퇴사 당일 남편분은 영면에 드셨다.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제 갓 태어난 아기를 두고서 살고 싶다 울부짖는 그 젊은 아빠가 안타깝고, 아들의 죽음소식에 치매가 발병하신 늙으신 어머니 대한 염려로 눈물이 났다.


그렇게 3월, 4월이 지나갔다. 어느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큰 건물을 관리하시 분이라 하셨다. 해님 씨와 함께 있다 했다. 해님 씨의 물품에 나의 번호가 있기에 전화를 한다 했다.


해님 씨의 “아랫도리가 너무 헐어 있어 걱정이 된다” 했다. 나도 모르게 “어떻게 아랫도리를 보셨냐”는 질문에 아저씨는 말을 바꾸고 전화를 황급히 끊었다.


해님 씨가 어떻게 그곳에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그 전화의 행방은 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해님 씨가 장애인인지 아닌지도 모를... 아니 알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예전 해님 씨의 버디버디 아이디를 삭제하기 위해 로그인을 했을 때 “같이 놀자, 같이 자자, 바로 만나자”는 순식간에 뜬 50개가 넘는 대화창에 엄청 놀랐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바로 인계했던 복지사에게 해님 씨를 데리고 있다는 분의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시간은 지나갔다.


내가 만약 그 현장을 끝까지 지켰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한 가족의 비극적인 시간을 함께 보내는 동안 나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만약 그런 상황이 발생된다면 더 나이 먹고 경험이 쌓인 사회복지사로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고찰해본다. 시간이 많이 지났어도 여전히 마음 아프고 눈물이 나는 건 그 상황은 내게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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