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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기 때문이다.

by 토리가 토닥토닥

송파구 잠실에서 중고등학교를 보냈다. 잠실은 나에게 힘든 지역이다. 중학교 3학년 때 왕따를 당했다. 5월 체육대회 때 시작되었다. 1학년은 피구, 2학년은 발야구, 3학년은 배구를 했다. 앞자리와 뒷자리의 선수를 바꾸라는 나의 응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왕따를 느끼기 시작한 후 학급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칼끝과 같은 노골적인 시선들과 수군대는 소리는 견디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할 곳도, 할 사람도 없었다.


삶은 빠져나올 수 없는 깊고 좁은 시컴한 맨홀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매일 꿈에서는 미로와 같은 무덤들 혹은 관 밖으로 삐져나온 시신들 가득한 장례식장 한가운데 있었다. 간신히 꿈에서 벗어나면 바로 가위에 눌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환경이 나에게 미치는 속도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였다. 정지하고 싶었다. 나는 내가 원인이며 가장 잘못하고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만 없으면 해결될 것 같던 그 밤에 죽음을 생각했다. 칼을 찾았다. 즉각 손에 잡힌 것은 눈썹 칼밖에는 없었다. 그 칼의 둔탁한 면은 몇 번을 그어도 상처와 아픔만을 남길 뿐 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침에 엄마가 팔목을 보았다. 학교로 찾아갔고, 선생님과의 면담이 시작되었다.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물이 깨끗하려면 계속 순환되어야 한다. 물이 순환되지 못하고 고여있으면 썩는다. 지금 너의 마음은 고여있는 물과 같다,"고 했다. 의도했던 말이건, 아니건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아 30년이 지난 지금도 박혀있다.



복지관 근처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징계 학생들을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등이 필요할 때 보냈다. 사유는 대부분 흡연이 제일 많았고 그다음이 금품갈취, 학교 내 싸움 등 폭력 순이었다.


학교 측에서 그룹의 아이들을 단수로 끊어 지역의 복지기관으로 보냈고 복지관에는 항상 ‘1명’의 아이들만 왔다. 아이들은 정말 순수했다.

중학교 1학년 여자아이는 흡연으로 왔다. 담배는 늘 말보로 레드만 피운다고 했다. 다른 담배는 핀 것 같지 않다며 싱겁다고 했다.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아이에게는 당연히 와 닿지도 않는 "폐가 조금이라도 더 자란 고등학교 들어가서 펴도 늦지 않다"는 말과 "복지관 근처에서 피면 안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일주일의 사회봉사 기간은 이 어린아이에게는 그저 휴식기 일 뿐이었다.


또한 만나는 아이들 중에는 왕따 가해학생들도 많았다. 주로 여학생들을 많이 만났다. 이 아이들 역시 한 명 한 명은 해맑고 순수했다.


영어로 아이는 child(차일드), 아이들은 children(칠드런)이다. 보통의 단어에서 단수와 복수는 크게 차이가 없지만 아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 자체가 달라진다. 아마 현실의 아이들도 단수와 복수에서 그 성격이 크게 갈리듯 말이다.


단수의 아이들은 착하고 순수하지만, 복수의 아이들은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일으키는 매섭고, 무서울 게 없는 잔혹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촉법소년법 폐지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특히 아무렇지 않게 왕따의 가해자임을 말하며 왕따인 아이들은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 청소년들에게 분노보다는 왕따 피해자로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영혼을 파괴하고 빈껍데기만 남겨버리는 그 상황에 부디 누군가에게 평생 저주받을 가해자로 남을 만큼의 살인자가 되지 말기를, 그럴 바에 차라리 기억에도 없는 방관자가 되었으면 하는 그 간절함을 말이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가해자인 아이들은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마도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그 설렘이 여유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말을 거는 그들이 무서웠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왕따의 공포는 새롭게 진급하는 학교와는 무관하게 가시지 않았다.


그 시기는 나에게 참으로 잔인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학교는 부적응 상태가 되었다. 고2 때까지 혼자 음악실과 미술실을 이동하고 점심을 먹었다. 함께 다닐 친구가 없어 늘 구석에 혼자 서 있었고 수련회와 소풍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나의 존재를 몰랐거나 무시했다.


그나마 사람답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던 건 고3 때 만난 친구들 덕이었다. 나는 친구들이 무엇인지 함께 다니는 기쁨이 무엇인지 고등학교 3학년 때 비로소 알게 되었고 웃으며 졸업할 수 있었다. 지금도 그 아이들이 나와 왜 어울려주었는지 궁금하다.




청소년기는 지옥이었다. 앞서 말했던 것보다 더 깊은 이야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고통의 시간을 보냈기에 지금 하고 있는 일중에 비슷한 상황을 보게 되면 느꼈던 부분을 투사하고는 만다.


극복의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내가 온몸으로 피나게 노력했던 극복의 시간들을 공유하고 위로한다. 그들의 고통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나의 말과 눈빛이 피해자인 그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었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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